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1. 청교도개혁운동의 기원(起源, Era)과 Background)(상)
청교도운동(Puritan Movement)은 서론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의 종교개혁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청교도란 용어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시기와 대상의 선정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내려오면서 쓰여진 역사적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첫째, 기독교대백과사전은 “청교도들이라는 이름은 1564년 의식과 예복 사용의 통일성을 강화하려는 주교들의 시도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둘째, 그랜드기독교낱말큰사전은 “영국의 개신교도를 지칭하는 말인데 이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교회(성공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제네바의 칼빈주의 종교개혁을 모방한,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요구한 사람들이다” 정의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운동은 하나의 교파운동이 아니라 성공회교도, 장로교도, 회중교도, 침례교도와 같은 다양한 부류에 속하는 개혁자들에 의해서 칼빈주의(Calvinism) 영향 하에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을 말한다.
그렇다. 청교도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것은 칼빈주의이다. 그중 핵심인 5대 교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청교도운동의 본질을 잘 알 수 있다.
1618년부터 1619년까지 2년 동안 개최된 도르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 (Arminianism)자들 이 제기한 5가지 신학적 문제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도르트신경(Canons of Dort), 즉 칼빈주의 5대교리가 채택된 것이다. 도르트총회는 개최국 네덜란드 이외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독일 등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회의였다. 이 총회가 채택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각 교리의 영문 앞자를 따서 ”TULIP교리”라고도 불린다. 1)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을 가리킨다. 이 교리는 개혁파의 신학적 구원론의 표준이 되어왔으며, 도르트총회 30년 이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7)의 신학적 기반과 표준이 된다.
청교도운동의 신학적 동기는 스위스의 츠빙글리(Huldrych Zwingli)와 그의 제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였으나, 점차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따르는 자들이 청교도운동을 주도함으로 칼빈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다. 즉, 청교도들은 칼빈(John Calvin)과 츠빙글리에 의하여 세워진 개혁주의신학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여 기독교적인 가정, 교회,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헨리8세 이혼으로 로마카톨릭과 결별, 인쇄술 발달 등 배경
영국 종교개혁 완성의 주역 청교도, 칼빈 영향력 많이 받아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개혁의 완성의 주역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헤론(James Heron)은 로마카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로부터 영국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14세기 종교개혁자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개혁운동을 청교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헤론이 주장한 것처럼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은 청교도와 유사한 면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청교도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청교도운동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샬 내핀(Marshall Knappen)은 그의 저서 “튜더 청교도 사상”(Tudor Puritanism)에서 청교도의 기원을 헨리 8세 때 종교개혁자였던 월리엄틴데일(William Tyndale)의 사상에서 찾았다(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p.11-12.).
1)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 발표
영국의 청교도 종교개혁은 아이러니(Irony)하게도 카톨릭교도였던 1534년 헨리8세가 지극히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 즉 ‘내가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되겠습니다’고 교황청에 요청을 했을 때, 교황 클레멘트7세(Clement 7)는 반대한다. 이에 반발한 헨리8세가 로마가톨릭교회와 잉글랜드의 교회의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된다.
헨리8세는 1521년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교황 레오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철저한 로마가톨릭교회교도였다. 그런 헨리8세가 1534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어 발표한 수장령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비 성경적 독립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결과적으로 헨리8세가 로마가톨릭교회와 잉글랜드교회와의 결별로 시작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점화 확대되는 시대상황을 맞이한다. 즉, 1517년 루터의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항의문, 면죄부 판매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전 유럽에 종교개혁의 기운이 전광 화석처럼 번져나갔다.
특히 1454년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서 인쇄술을 발명하고 유럽 종교개혁의 기반이 되어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비판적인 글이 대거 출판되고 평신도들도 교회를 비판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Lewis W. Spitz., 종교개혁사, p.221). 그 반응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헨리8세가 “교황의 머리는 잘랐지만 그의 왕국 안에 개혁자들을 남겨둔 것으로부터 청교도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월리엄 틴데일(Tyndale)과 케임브리지의 종교개혁자 토마스 빌니(ThomasBilny)를 통해 종교개혁사상이 영국에 토착화되면서 청교도운동이 싹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헨리8세는 로마카톨릭교회로 돌아가려는 자를 반역자로 처형하였다.
또한 헨리8세는 1538년 크롬웰(Cromwell)과 토마스 크렌머(Thomas Cranmer)의 조언을 받아들여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전국 교회의 각 교구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성공회)내에는 여전히 천주교적인 요소가 교회에 잔존하고 있었다. 반쯤 이루어진 개혁을 철저하고 완전한 개혁을 위하여 등장한 무리들이 바로 청교도들이다. 그러나 헨리8세는 자신의 교권을 유지하고자 성경대로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는 전혀 허락하지 않았고, 도리어 성경학자 월리엄 틴데일을 화형 시켰고, 이에 존 후퍼(John Hooper)와 존 베일(John Bale)과 같은 개혁자들은 대륙으로 피신한다.
2)크렌머(Thomas Cranmer)의 개혁운동(Reform Movement):
1547년 헨리8세가 죽자, 에드워드6세(Edward 6, 1547-1553)가 왕위를 계승한다. 그는 토마스 크렌머나 존 낙스 같은 당대 최고의 개신교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다.
영국교회에 칼빈의 개혁사상이 급속도로 유입되어 예배 시에 성직자들의 복장이 간소화되고 성직자의 결혼이 허용되었으며 교회 안의 우상들이 제거되었다. 특히 켄터베리의 대주교인 크렌머의 도움으로 미사를 위한 희생제단이 개혁되고, 성찬식 때에 일반 평신도들에게 떡과 포도주도 함께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개혁을 주도한 실제적 인물은 켄터버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렌머(Thomas Cranmer)였다. 그는 확신 있는 개신교도였고 영국교회를 개혁하는데 전심전력하였다.
특히 크렌머는 칼빈과 루터의 후계자 멜랑 히톤(Philip Melanchthon) 등 대륙의 개혁자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마틴 부쳐(Martin Bucer), 피키노(Ficino)와 같은 대륙의 개혁자들을 초청하여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크렌머의 개혁운동으로 영국교회는 유럽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들 중의 하나로 변모하였다. 목회자의 결혼이 허락되었고, 교회에서 우상이 제거되었다.
종교개혁사상이 드러나는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1549년 출판되었다. 1552년에는 진일보한 제2 기도서가 나타났으며, 성화(聖火)가 교회에서 사라졌고, 제단 대신 성찬상이 등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칼빈(John Calvin)의 신학사상이 가미된 42개조 신조가 출판되어, 영국인들의 신앙지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헨리8세를 피하여 대륙에 있다가 1549년에 귀국한 후퍼(John Hooper)는 영국교회 안에 남아 있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들을 속히 없앨 것을 촉구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특히 후퍼는 1550년 성직자(聖職者) 복장(服裝)을 착용하는 것을 로마 교황청의 대표적인 잔재(殘滓)로 보아 이를 비판하여 복장 논쟁을 일으켰다(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p.14-15).
3)피(Bloody)의 메리(Mary, 1553-1558)의 반 개혁운동과 숙청(Cleanup)
1553년 에드워드가 16세 어린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 후, 헨리8세와 캐더린의 딸 스페인 공주 메리가 즉위한다. 메리는 반 종교개혁운동을 지지하던 스페인의 필립2세(Philip 2)와 결혼하여 로마카톨릭교회를 재건(再建)하고자 하였다. 그의 종교정책에 반대(反對)하는 종교개혁자 존 후퍼, 존 브래드포(John Bradford), 휴 라티머(Hugh Latimer), 런던의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와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렌머 등 개혁자들이 스미스 필드(Smith Field) 화형장에서 순교(殉敎)를 당했다.
크렌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순교자처럼 죽어갔다. 스미드필드 화형장에서 희생된 자가 무려 286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의 메리’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처형된 수천 명에 비교하면 온건한 편이었다. 또한 피의 메리보다는 그녀는 차라리 비극의 여왕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G.R.Elton,The Reformation in England, p.242). 다른 사람들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스위스, 독일 등지의 유럽대륙으로 8백 여명이 망명하였다(De Lamar Jensen, Reformation Europe, p.161.).
특히 강요와 회유공작을 받은 토머스 크렌머 대주교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 끝에 개신교 믿음을 버린다는 믿음철회서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꾸고 순교하였는데 순교 직전, 개신교 신앙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며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손이 가장 먼저 불에 타야 한다며, “나는 로마교황을 거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적이며, 적그리스도이며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자입니다”라 말하고 화형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렇게 메리여왕의 박해가 계속되자 800여명의 개혁자들은 스위스, 독일, 등지 유럽 대륙으로 망명한다. 그들은 취리히 바젤 제네바에서 개혁파 목사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면서 피난민 교회를 세웠고,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와 존 칼빈과 같은 개혁자와 교제함으로 신학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존 낙스를 비롯한 230여명의 개혁자들은 제네바로 가서 칼빈의 도움으로 피난민 교회를 세우고, 예정론 등 칼빈의 영향이 드러나는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신앙의 표준삼았다(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p.16).
kimjoyh@gmail.com
05.1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