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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37)

부제: 교회사가 가르친다!(23) - 신앙적 관용의 함정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관용

 

요즘 한국에서 트로트음악이 유행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 포크송과 팝송에 심취해 있던 7080세대에게 트로트는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낡은 음악이었다.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자신들과 트로트를 좋아하던 부모님 세대 사이에 서로 넘을 수 없는 강이 놓여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트로트음악이 유행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7080세대 또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장르를 포기하고 부모님 또는 조부모의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음악이 있듯이, 어르신들 역시 자신들에게 기쁨을 주는 음악을 즐겨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생소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불편 없이 예능의 한 부분에 자리하게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발견된다. 예배스타일과 이때 부르는 찬송의 스타일에서 분명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찬송가와 성경책을 직접 펴서 사용하는 것이 선호하는 성도들과 예배당 앞쪽에 비쳐진 스크린 사용에 만족하는 성도들이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 더 이상 찬송가집에 수록된 전통적 형태의 찬송과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복음송 사이에 구분이 없다.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악기도 마찬가지다. 피아노와 오르간 이외에도 관현악기는 물론 드럼을 포함한 전자악기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 인해 끊이지 않았던 초기의 갈등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변화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보자. 교회에서 젊은 세대를 놓칠 수 없으니 그들의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이 가능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관용’을 미덕으로 삼는 이 시대의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간주하던 것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이 세상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즉 내 것이 옳으면 상대의 것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과 신앙 

 

지금 우리는 관용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 대신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도록 요구한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견이 있어도 침묵하는 태도를 높이 샀다. 지금은 다르다. 관용은 나와 다른 상대를 수용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는 기본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관용은 표현의 자유를 동반시키고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 교회를 향해 절대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독선적 행위라며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교회 내에서 조차 신앙적 관용을 미덕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관용적 태도와 바른 신앙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을 융화시키는 사회라 할지라도 기독교의 진리는 그 어느 것과 타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관용정신을 수용하려면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고백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십자가 복음을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근대에 어떤 일이?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수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를 대항하여 성경적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주장한 결과 개신교의 새로운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의 개혁을 논할 때 주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으로부터 배울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16세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적용하려 할 때에 기대만큼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흘러온 역사 안에 답이 우리가 찾는 있다. 지각의 변화로 지진이 일어나면 든든한 기초 위에 집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동안 인간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중요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17세기 중반에 시작된 ‘근대사상’ 즉 모더니즘의 출현이다.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인간 자체이다. 이런 태도는 종교개혁 전 14세기부터 나타났던 르네상스의 기본정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성의 시대를 알리며 나타난 계몽주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역사의 중심에 올려놓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지닌 가치를 절대화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 지닌 잠재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는 일에 매진하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대신 교회와 성경이 가르치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권위가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모던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네 데카르트(1596-1650)의 영향으로 인간을 생각하는 자율적 주체로 규정하고 개인의 경험과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뿐 아니라 근대사상은 과학혁명에 힘입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난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아쉽게도 과학 활동의 주체인 인간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이 더해질수록 초월적인 하나님을 포기하려는 태도가 분명해졌다. 그들이 지녔던 과학적 사고는 계시를 기초로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애석하게도 성경이 과학의 검증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이신론(Deism)’은 이성에 근거한 이론으로서 그들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 대신 종교의 역할을 제한시켜 신앙의 체계가 아닌 도덕적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는 원리로 전락시켰다. 

결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계몽주의 이후 성경을 기초하는 신앙을 지닌 교회는 무차별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럽사회는 모더니즘을 계기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중심의 세속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 찬란했던 기독교의 모습이 현재 관광지와 박물관으로 남아있게 된 슬픈 현실의 역사적 근거이다.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미덕을 높이 사면서, 

계시를 기초로 하는 기독교 진리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수용될 수 없다”

 

모더니즘 이후 

 

이성의 가치를 절대화 하였던 모더니즘도 한계가 있었다. 회의론자로 불리는 데이빗 흄(1711-1776)은 경험주의 체계를 중심한 이신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저 마음의 습관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임마누엘 칸트 (1724-1804)는 이에 반응하여 보다 능동적인 이성을 소개하였다. 그는 인간의 경험 안에 존재하는 대상과 그 범위 밖에 있는 대상 사이를 구분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실천적 측면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로서 칸트는 모더니즘이 강조해오던 자율적 자아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로서 근대 사상은 진리를 발견함에 있어서 급진적 개인주의로 전환하게 되었고, 인간이 객관적인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확신의 길이 열렸다.  

현재 우리는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전환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더니티에 대한 반감을 기초로 1930년부터 시작되었고, 1970년대 이후 사회 모든 영역에서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문화적 현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서구를 지배하고 있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쇠퇴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인해 그 현상이 촉진되었다. 

산업화 시대를 대신하여 나타난 정보화 시대는 날이 갈수록 온 세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지구 온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다. 방송 전문기관이 주로 담당했던 뉴스전달이 지금은 유부버들에 의해서 보다 생생하게 영상으로 전달되고 있다. 특정인의 성향에 따라 각색되지 않은 채 전달된 정보를 해석하는 것은 수신자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사건을 어떤 절대적인 틀에 넣고 이해시키려하면 도리어 반감을 일으킨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역시 중심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특정 사상을 심어주려는 것을 행위를 힘으로 억압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연극이나 소설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데, 이야기의 결론은 작가의 몫이 아니고 관객과 독자가 알아서 결정하도록 열어 놓는다. 전혀 조화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병치하는 미술의 콜라주 기법도 포스트모던의 특별한 형태이다. 이런 모습은 연극에서도 보이는데, 배우와 관객이 함께 작품을 완성해가도록 한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현실과 허구 또는 영원과 내재 등 대조되는 장면을 동시에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중심을 흐려놓는다. 이때에도 관객이 알아서 줄거리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거부해야 할 정신 

 

자연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결론에 대한 관심이 없다.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의 영향력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을 결정짓는 자체를 거부하는 대신, 개인의 감정과 직관에 따라 판단하도록 맡겨둘 것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포스트모던 정신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특히 정보화 시대의 산물인 SNS를 통해 수많은 정보들이 전달되고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얻을 수 있으므로 삶이 많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정보를 대하는 나의 몫이다. 좋은 평을 많이 받고 있는 식당을 고르면 되고, 소비자들의 사용 후기를 흩어보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중심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정신은 건전한 신앙의 적이다.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미덕을 높이 사면서, 어떤 모양이라도 계시를 기초로 하는 기독교 진리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수용될 수 없다. 이 시대는 끊임없이 특정한 기준과 진리를 상실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거스르는 불편한 삶을 요구한다. 복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불변하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물론 인간의 감정과 직관은 아담의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성경적 진리를 벗어난 신앙에 대한 관용은 반드시 피해야 할 함정이기에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06.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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