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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24)

교회사가 가르친다!(11)-고백하는 신앙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수용 또는 거부 

 

모든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전통은 세월을 걸쳐 축적된 결과물로서, 후대의 관습과 가치체계 형성에 영향을 준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감정적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의 예배는 열정적이다. 찬양과 기도가 뜨겁게 진행된다. 성도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반면에 지적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의 예배는 정적이다. 아멘 소리나 박수치는 것을 꺼려한다. 이 외에도 제자훈련, 해외선교, 자선사역, 정치참여, 지역사회봉사 등이 교회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경우도 있다. 교회가 어느 지역에 개척되었고, 개척 목회자와 성도들이 어떤 성향을 지녔었는지가 전통의 방향을 결정한다. 

교회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수용하고 유지하여야 할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시대가 변화하고 성도들의 성향과 목회 방향이 달라지면, 과거 전통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고, 아예 거부하거나 부분적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변화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 전통에 담겨있는 유익한 점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불필요한 긴장관계가 생겨나거나 분쟁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온 교회가 함께 뜻을 공유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인내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전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란 세상이 크게 바뀌어도 진리 자체로 남아있다. 각 시대마다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토대로 차근차근 축적해온 내용물이다. 지역 교회의 전통은 수용 또는 거부가 가능하지만, 지난 2천년을 역사가 후대 교회에 선사하는 소중한 영적 유산으로서의 전통은 반드시 지켜가야 한다.  

 

성경과 교리 

 

한국교회는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초기부터 교회가 세워져가는 과정에서 시종일관하게 ‘성경중심’이 강조된 결과이다. 주일에 성도들은 오전에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는 몇 시간동안 성경을 배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현재에도 ‘수요예배’와 ‘구역모임’을 ‘수요성경공부’와 ‘구역성경공부‘라고 부르는 교회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토록 초창기부터 성경에 뿌리를 둔 신앙인들을 배출한 것은 매우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의문점이 남아있다. 성경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단들이 출연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단들도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왜곡시켜 거짓 이론을 그럴싸하게 전개한다.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도록 철저하게 훈련시킨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지만 잘못된 이단사상에 넘어가는 이유가 있다.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망과 저주 아래 놓였던 죄인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길과 구원을 받은 뒤 추구해야 할 경건한 믿음의 삶의 내용을 제시한다. 

성경 66권의 저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구약과 신약은 물론 그리고 각 권이 일맥상통하기에, 성경 전체의 내용을 근거로 내적인 체계 즉 ’교리‘를 발견하게 된다. 교리란 체계화된 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은 교리를 믿음의 근거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관점을 갖게 된다.  

 

무관심

 

한국교회는 교리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없다. 초기 선교사들이 선교지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의도적으로 교리보다 성경을 강조하였기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교리가 신앙으로부터 분리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다.  

좋은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마음으로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하여왔다. 그러나 성도의 감정과 비교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 믿음의 내용이다. 즉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는 그 분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계획 등에 대한 동의가 전제되어있어야 한다. 지정의 3부분이 잘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교리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동시에 영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차가운 교조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교리가 빠져버린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성향을 지니게 한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낳는 영적 폐해는 매우 크다. 

교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후대 교회에 건네준 영적 유산이다. 각 시대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담겨있는 진리를 찾아낸 것이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에 이단이 등장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으로 큰 혼란을 경험하였다. 이때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결과, 교회는 그가 100% 인간이시며 100%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였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당시 교회가 결정한 기독론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선배들이 걸어갔던 성경적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또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교회가 지녀야 할 신앙적 전통의 가치와 내용을 알려주어야 한다.  

 

고백서 

 

신앙은 반드시 고백되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였다.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기적을 보고 메시지를 높이 평가하였지만 예수를 인간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말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베드로의 답변은 기독교 신조의 핵심을 이루는 신앙고백이었다.  

교회는 주일예배 또는 공적모임에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쉽게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사도신경 안에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핵심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장구한 세월동안 신앙인들이 이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바쳐왔다. 

 

성경이해에 필수인 교리는 신앙인 정체성 확립시켜주며 영적성장 가능케 

지정의가 조화이룰 때 건강한 신앙소유...형식적인 신앙고백 하지 말아야 

 

사도신경은 제자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다. 세례자 교육을 위해 2세기 말에 나타난 ’구 로마신경(Old Roman Creed)‘가 작성되었는데, 후에 사도신경의 모체가 된 문서이다. 215년경 히폴리투스(170-236)에 의해 작성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전능의 주재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나이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셨고,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되시었으며,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맞아 계시다가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분을 믿나이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그리고 부활을 믿나이까?”

서방 교회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공인한 것은 8세기의 일이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그들이 작성하지 않았어도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수한 신앙의 진리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초대교회 변증가들과 교부들도 짧고 정교한 신경들과 간단한 문답형 교육지침서들을 작성하였다. 이그나시우스(35-110), 순교자 저스틴(100-165), 이레니우스(130-20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5-216), 터툴리안(160-220), 오리겐(185-254) 등이다. 그들은 각자 처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요약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한 것인데, 훗날 사도신경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사도신경은 특정인 또는 종교회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걸쳐 형성된 전통의 산물인 것이다.    

교회에서 실시되는 세례교육 과정에 사도신경 내용이 포함된 이유가 있다. 이는 세례자에게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였던 초대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비교해볼 때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례를 매우 중대한 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방식을 결단하였음을 외적 의식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고난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313년 종교의 자유가 선언되기 전까지 로마황제들의 핍박이 지속되었다. 54년 네로황제로부터 시작하여 249년까지 산발적이었으나, 데시우스황제로부터 본격적 박해가 자행되어 하루에 수천 명이 순교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에 속한다는 외적선언은 자신이 순교까지라도 감당하며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세례는 자신이 신앙을 고백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생명까지라도 전적으로 바치겠다는 표시였다.   

 

형식주의 

 

요즘 예배에서 사도신경이 사라지고 있다. 소요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절차가 복잡해서가 아닐 것이다. 

고백적 신앙에 대한 이해 부족, 사도신경이 가톨릭의 것이라는 음모론, 또는 이보다 더욱 심각한 이유일 수도 있다. 종교개혁 이후 17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고백적 신앙‘을 무시하는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났다. 교회가 전수받은 고백신앙의 전통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이성종교로 전향시켰다. 사도신경에 담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에 사도신경을 고백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형식의 틀에 박혀 입술로만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사도신경은 “나의 고백”이다. 한글번역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으로 시작하여 중간에 “내가 믿사오며...”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I believe in...”으로 시작하는 영어번역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도신경은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분명히 안다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결코 형식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내용이 간단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핵심교리를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 등 네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그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도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백자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은 교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개혁주의 교회는 전통적으로 고백적 신앙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의 67개 조항(1523), 베른신조(1528), 제1 스위스신앙고백(1536), 프랑스 신앙고백(1559), 하이델페르크 신앙교육문답서(1563), 제2 스위스신앙고백(1566),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7) 등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질문과 답‘의 형식의 교리교육을 위한 문답서를 작성하여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숙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시대는 과거와 같이 신앙인들에게 순교를 각오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영적 유산을 기억하자.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세례를 받았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함께 드렸던 신앙고백의 전통을 이어가자. “나”와 동일한 신앙을 지닌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우리”의 고백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가족이 된 형제와 자매들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드리는 신앙고백을 크게 기뻐하신다.

covenantcho@yahoo.com

11.1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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