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21)

교회사가 가르친다!(8)-성속이원론의 틀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이원론 

 

성경은 대조법이 자주 사용한다. 대조(對照, contrast)는 상반되는 것의 차이점에 관심을 갖는다는 면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비교(比較, comparison)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살펴보자.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낯과 밤, 아침과 저녁, 땅과 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등이 대조되어 있다.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하여 대조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대조법은 성경의 핵심내용인 복음을 설명할 때에도 사용되고 있다. 죄인과 의인,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선택과 유기, 현세와 내세, 그리고 양과 염소의 구분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원론(二元論, dualism)은 대조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성경의 대조법에 익숙하면 이원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원론의 핵심은 대조를 이루는 근본원리가 서로 독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대조’의 다른 표현은, 두 개체 간의 ‘갈등’ 내지는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립된 개체가 상대를 밀쳐내어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한 예로,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은 상반되는 두 세력이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은 상대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존재할 수 없는 이원론의 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원론 사상은 기원전 4-5세기에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출신 철학자 플라톤(Plato)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그의 이원론은 두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의 대립관계를 중심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전한 곳이나,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로서 불완전하고 열등한 곳이다. 이 내용은 플라톤이 사용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현상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은 동굴 안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런 복사된 세계를 벗어나 동굴 밖으로 나아가 태양을 바라보아야 참된 세계를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 속에 두 개의 상반되는 세계가 공존한다고 하였는데, 영혼을 육체보다 뛰어난 존재로 여겼다. 육체는 그 안에 감옥과 같이 영혼을 가두어 놓고 오염시켜 신성을 알 수 없게 한다. 그 결과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돌아가려는 열망 속에서 살아간다.

초대교회는 플라톤의 이원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이 원래 자신이 살고 있던 영원한 신적 세계로 돌아간다는 영혼불멸설을 좋은 예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가 플라톤의 철학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시하던 성육신 교리가 이원론과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로부터 내재적 세상과 초월적 세상을 구분하는 서구 전통의 이원론적 사고가 시작되었다. 

이원론 사상은 교회사 모든 시대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중 성도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기친 것은 성속이원론으로, 현실 속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대립하며 존재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이 이원론은 성도들에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도록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고, 무엇을 버리고 취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훌륭한 신앙인은 오직 성스러운 것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 살아가야 한다.  

성속이원론

 

그렇다면 성속이원론은 무엇에 근거하여 성과 속을 구분할까? 물론 성경적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지만 실상 문자적인 내용을 넘어 ‘신성’이란 개념을 절대화 시킨다. 신성은 신성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 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초월된 의미가 강조될 때 사용된다. 

신성과 세속의 개념을 구분함에 있어 성속이원론이 지닌 문제점은 매우 심각하다. 성스러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함에 있어서 그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가치 기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각자가 지닌 고유의 종교성과 처한 상황으로부터 받는 직접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성스러움’에 대한 개념이 인간의 본능적 종교의식과 연관되면 더욱 객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 신은 인간과 구분되는 신비스러운 존재로서,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곳일수록 이 신과 연관된 성스러움을 중시한다. 각자 추구하는 신과 연관된 성과 속에 대한 정의는 극히 사적이다.  

힌두교는 암소를 신성시 한다. 차도에 소가 누워있으면 비껴가고, 그럴 수 없다면 소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떠날 때까지 기다린다. 힌두교의 특징인 암소숭배의 기원이 매우 흥미롭다. 과거 심한 가뭄 시 사람들이 마구 소를 잡아먹은 결과 밭갈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버터를 얻지 못하게 되자, 암소를 신성시 하는 관행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반영하듯, 그들은 자유로운 신분인 거룩한 소와 노동에 사용되는 소를 구분하기도 한다. 다른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은 이와 같은 힌두교의 신성기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성과 속을 구분하는 신앙적 신념에 의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을 생소하게 생각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교회 성속이원론 

 

한국교회의 성속이원론은 초기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지녔던 성과 속에 대한 구분 개념과 한국인의 고유 종교심이 혼합되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시작될 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초창기 교회를 찾은 사람들은 농촌에 거주하던 평민들이었다. 선교사들이 직접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순회전도에 힘쓴 결과, 초기부터 도시보다 지방에 예배처소가 많이 생겨난 것이다. 

초기 성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중심의 보수적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신봉하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상하간의 수직적 계급 차이가 유지되고 있던 때였기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평민들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 건강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항상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모습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서양에 대해 눈을 뜨고 있던 상황가운데 팽배했던 사대주의적 사상의 영향도 중요한 이유였다. 서양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로부터 서양의 문화를 접함으로 자신들이 격상된다는 확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초기 성도들은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내용과 사상을 평가할 만한 지적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열강들로 인한 불안정한 시국을 이겨내는 큰 힘을 제공받는 상황 속에서 반론을 제시하거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아가서 한국인 고유의 종교성으로 인해 성속이원론이 한국교회에 더욱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악한 악마의 횡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능력을 지닌 절대자를 인정하는 종교성을 지녀왔다. 자연히 그 절대자와 연관된 장소와 사람을 신성하게 여겼고, 이는 성과 속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국의 역대왕조가 명산을 선정하여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는 산에 살며 산을 다스리는 신령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사 장소와 인도자들은 세상의 것과 구별되는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섬겼다.    

생활주변에서도 장소와 사람을 신성시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각 마을주변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돌을 쌓거나 나무에 실과 천 등을 매달아 놓음으로 도시를 수호하는 신의 영역임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중병에 걸렸거나 불운에서 탈출하기 위해 찾았던 내림굿을 하는 박수무당 역시 일반 사람들과 급이 다른 신성한 자로 여겨졌다. 

초기 성도들은 성속이원론의 영향으로, 교회당을 세상의 건물과 대조되는 성스러운 장소로 간주하였다. 또한 목회자를 대할 때에 세속직업과 구분되는 성직을 맡은 자로 대하였다. 절대자인 하나님과 직접 연관을 맺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성속이원론의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교회당에서 드리는 기도, 특히 새벽에 드리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고 믿는다. 교회 내에서 사용되는 집기와 가구를 성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강대상이 놓여있는 곳을 구약시대의 지성소로 간주하고 오직 자격을 가진 자만 그곳에 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성속이원론의 폐단 

 

초대교회는 성속이원론의 사상으로 인해 영적 도전을 받은 경험을 하였다. 이는 영과 물질이 극단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 영지주의자들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전하고 초월적인 신은 결코 이토록 불완전한 이 세상의 물질을 창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하고 더러운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높은 차원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창조론, 성육신, 섭리론, 그리고 구원론을 포함하여 성경적 진리를 거부하는 행위였다.  

초대교회 대표적 교부 어거스틴이 한때 심취하였던 마니교(Manichaeism) 역시 대조되는 이원론에 기초한 이단종교였다. 마니교는 빛과 어두움은 이 세상에 공존하면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신비주의적 종교체계를 갖추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허구적인 환상주의에 회의를 느낀 뒤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신학적 질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의 영적 대립 또한 영원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사이의 분리 등을 통해 이 세상의 선과 악에 대한 성경적 개념 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중세교회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제도적 교회를 드러내는 이원론을 크게 발전시키고 정착시켰다.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또는 Charles the Great, 742-814)는 어거스틴의 글을 오해하고, 유럽 대규모 영토에 기독교제국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려고 했다. 그는 로마를 점령하여 귀족에게 축출당한 교황 레오 3세(Leo III, 816년 사망)를 도와주었고, 그 대가로 로마황제에 오르고 신성로마제국을 창시한 것이다.  

1000년의 중세교회사는 유럽이 강력한 기독교 국가로 세워지고 몰락하는 모습을 함께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회와 세속 또는 교황과 황제의 갈등을 낳은 성속이원론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탁월한 지도력을 지녔던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20-1086)는 ‘교황절대주의(papal absolutism)’의 기반을 놓았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이 날로 커져갔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교회가 세속 권력위에 놓여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황제 역시 교황과 교회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키웠다.                           두 세력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은 권력욕을 향한 인간의 교활함과 사악함을 천하에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는 힘은 잃어갔다. 동방교회는 줄곧 세속 황제가 기독교 수장보다 높은 권위를       지녔다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제도 아래 있었다. 심지어 향후 교회역사에는 왕이 교회수장이라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속이원론을 넘어 

 

중세교회에서 틀을 잡은 성속이원론은 교회와 세속의 갈등으로 대표되지만 성도들의 삶과 신앙의 영역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교회에서 하는 예배, 기도, 봉사, 성경공부, 전도 같은 일은 신성하지만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 심지어 취미생활과 운동 등 여가를 즐기는 것들까지도 세속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발달하였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분명한 선이 그어진 것이다.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 있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각종 성례를 통해 은혜를 주입 받으려면 반드시 교회를 찾아야 했다. 나아가서 오직 성직만 거룩하고 세상의 직업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성속이원론 역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성속이원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성과 속을 구분하고, 세속 영역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를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며 그의 통치와 섭리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오류를 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교회 안과 바깥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자녀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교회 안에서 모여서 세상과 담을 쌓고 종교적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기대하신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편견과 오류를 과감히 깨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covenantcho@yahoo.com

10.03.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