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복음과 상황
건강한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도들이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동시에 삶 속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의무를 받았다. 그들은 본문의 장르와 성격은 물론 전후 문맥과 역사 문화적 배경 등을 세심하게 연구한다. 본문이 기록된 상황을 무시하면 문자주의(Liberalism)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진리가 적용되는 삶의 현장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성도들이 살아가는 상황을 집중하여 살펴야 한다. 구체적 실천을 전제하지 않는 사변적 진리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교회사 흐름의 줄거리는 복음의 확장이다. 복음과 상관관계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각 시대 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중대한 임무였다. 그런데 3세기 중간까지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현재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복음전파를 책임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 당시는 주로 사도들에 의해 신앙훈련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복음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소원은 자신들이 전해들은 복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으며, 대단한 웅변보다 구별된 삶을 통해 건전한 영향력을 끼치는 방법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친밀하게 다다가기 위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표현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단이 출현하고 핍박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 변증가들이 등장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와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 터툴리안(Tertullian, 144-240) 등은 성경은 물론 당시 유행하던 헬라 철학에 능통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내용을 변호하고 수호하는 전문적 사역을 감당하였다. 나아가서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속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이때 교회가 붙들어야 할 성경의 진리가 어떤 것인지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의 위치가 날로 중요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 교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초대교회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지속적으로 복음과 상황 사이의 긴장관계를 경험해왔다. 하나는 이미 복음을 전달받은 성도들이 상황의 변화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영적 황무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복음과 상황 중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불변하는 복음을 변하는 상황에 잘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역사에 남겨진 발자취를 살펴보면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통적 복음을 새로운 상황에 접목시키지 못하고 실패한 경우가 있었으며, 이와 반대로 전통적 복음이 아예 새로운 상황에 흡수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지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성도들의 신앙이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상황, 과연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민중 신학
1970년에 서남동과 안병무 등의 소수 진보적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이 전개되었다. 일반 성도들에게 매우 생소할 수도 있지만 근대사를 지나며 큰 변화를 경험한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생겨난 매우 한국적 신학이었다. 그들이 이해한 민중은 매우 특이하다. 그 당시 경제개발정책이 거듭 성공을 거둔 결과 이전에 비해 잘 사는 사회로 변해갔다. 그러나 독재적 지배층에 횡포로 인해 부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된 상태에서 희생을 감수해야했던 계층이 있었다. 이들이 민중이었다.
민중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신학의 틀에 한국 상황을 비추어 반성하면서 복음의 의미를 재발견하려 하였다. 그들은 민중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실체로 보았으며, 심지어 ‘민중이 예수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들에게 복음이란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정치적 구원을 통해 해방시키는 행위였다. 1980년대 이후 찾아온 상황의 변화 속에서 민중신학은 새로운 양상을 맞았다. 과거 힘없이 지배를 받아야 했던 노동자계급이 결속하여 동맹을 맺음으로 힘을 지닌 집단이 되었다. 구조적이며 체계적인 투쟁을 통해 변혁을 시도하는 기독교사회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압제 당하고 억눌린 자의 입장에서 공평한 사회를 외치던 진보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새로운 기득권으로 등장하였다. 현재 민중신학은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과거 보수적 신학자들은 민중의 삶 자체를 성경의 내용이자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민중 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영적 구원 대신 정치적 구원을 신학의 주제로 삼을 수 없다며 거부한 것이다. 민중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음을 정치화할 뿐 아니라 마치 복음이 특정인들의 전유물인 듯 오해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이 지닌 진정한 중요한 위험성은 따로 있었다.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겨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연속이란 것이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1970년대에 등장한 흑인신학(Black Theology)과 여성신학(Female Theology)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신학의 ‘상황화’가 낳은 결과물이었다.
상황화
상황화(contextualization)란 무엇인가? 상황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주위에 둘러싸여 동반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인간은 상황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므로 ‘상황화’는 복음이란 반드시 새로운 상황을 중시하고 적절하게 관계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자신의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상황화는 토착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복음전파 초기에 필요한 토착화의 원리인 자치, 자립, 그리고 자전을 근간으로 탄생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착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와 편견의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제시된 원리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상황화를 매우 필요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화가 출발된 역사적인 배경과 내용, 그리고 향후 끼친 영향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으며 경계의 대상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용어는 1961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에 가입한 ‘국제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1957-58년 가나회의에서 결성한 ‘신학교육기금(TEF: Theological Education Fund)’에 의해 1971년에 처음 등장하였다. TEF가 제3국에 소재한 신학교 교육기관을 위해 기금과 교과서를 공급하고 도서관을 지어주는 사역을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3국의 상황을 살펴본 결과, 서구의 신학적 전통을 따라 개인의 구원과 윤리에 치중하는 대신, 교회가 억압자의 지배를 받으며 억눌려 있는 자들을 해방하는 복음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TEF가 추구한 상황화는 제3세계의 전통적 문화적 관점에 대한 복음의 반응을 포함시켰으며, 신학 교육을 통해 그들의 문화,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 구조를 포함한 모든 영역을 바꾸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제3국이 지녔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적 변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황화의 목표를 예수님의 도성인신에서 찾았다. 그가 이 세상에 내려온 궁극적인 목적을 소외되고 가난하고 버려진 자들을 올바른 위치로 회복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표준적 진리로 삼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이 이해한 교회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즉 상황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복음과의 접촉점을 찾으려하지 않는 대신, 현실에 도전하여 변화시킬 수 있을만한 ‘새로운 복음’을 찾는데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상황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서구의 전통신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서양인들은 제3세계인들과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생명을 잃은 정적인 지식 체계에 갇힌 비 복음적이며 반 기독교적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논리 속에서 발전시킨 성경신학에 근거해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려고 시도하지만, 현지인들의 고유적 고민과 질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노력도 허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3세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상황화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 잡으면서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20세기에 등장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통해 제3국의 상황을 절대화 시키는 신학의 위치를 얻게 되었다. 변화가 중심개념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물에 대한 해결이 필요한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인간화와 정의실현을 위해 조화나 타협보다 투쟁을 선택하였다.
반성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행동의 조화를 요구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의 구원과 성화를 뛰어넘어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노력해야한다. 만일 복음을 전하려한다면 먼저 상대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 매우 많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이 널려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였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과거 한국교회는 정치와 경제 권력과 유착한 결과 영향력을 잃고 마땅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던 적이 있다. 교회에 사람들을 채우는 일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사회를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사회적 빈곤과 소외, 정치적 불의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면이 부족하였다면 이를 시정해야 한다.
경각심
복음은 상황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닌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복음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도 변할 수 없는,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된 정체성과 기본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정치신학, 해방신학, 과정신학, 화해신학 등 상황화의 산물은 모두 혼합주의와 상대주의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진리의 객관성을 무시하고 그 내용을 특정상황에 주관적으로 끼워 맞추는 과오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상황절대주의는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도리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주어진 복음을 변형시키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접목시키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사명이다. 투쟁과 혁명적 방법을 통해 상황을 먼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선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통해 변화를 받은 자들이 사회 각 계층에서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 방법이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영원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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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