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돈의 힘
돈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시동시켰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세우며 공개토론을 요청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면죄부이다. 그가 지적한 근본적 문제는 신학적인 내용이지만 돈에 집착하던 중세 로마교회를 향한 정면 도전이었다. 면죄부를 팔던 자들이 가장 우려하였던 것은 교회로 흘러들어오던 돈의 흐름이 끊어놓는 여론의 확산이었다.
초대교회 수도원운동은 핍박이 사라진 세상에서 진정 경건한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사들은 안락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사막과 들판, 그리고 산 속을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 세상의 유혹이 순수한 신앙에 결정적인 방해가 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원이 초심을 버리고 타락의 온상이 되었다. 돈의 힘 때문이었다.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이 수도사들로 하여금 초심을 버리게 한 것이다. 청빈한 삶은 중세에 새롭게 시작된 수도원운동의 모토였다. 역시 그들도 돈의 힘 앞에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기독교가 서유럽을 장악한 후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종교적 힘의 확장’으로 오해한 듯하다. 각처에서 흘러 들어오는 돈은 교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부와 명에를 누릴 수 있었다. 국가와의 대결 구도 속에서 교회는 돈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돈의 힘을 알고 있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것들을 맛본 뒤 더욱 많은 돈을 취하려는 욕망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패러다임의 변화
16세기 종교개혁의 전야에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봉건사회의 구도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서유럽은 이미 11세기 십자군운동 전에도 동방세계와 활발한 무역의 통로를 열어 놓았다. 향신료, 설탕, 실크, 염료 등 새로운 물건을 수입하였고, 북부 이탈리아의 모직물과 중부 유럽의 은 등을 동방으로 수출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운동 이후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면서 교류하던 물건의 종류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 결과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전에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망이 늘어났다. 또한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찾게 되었다.
기존의 봉건제도는 토지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은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 물자를 직접 생산하였다. 영주들은 전통적인 노동 구도로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많은 ‘생산’이 많은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특히 14세기 전후에 발생한 흑사병이 유럽사회를 강타했다. 3분의 1, 지역에 따라서는 70%의 목숨을 앗아갔다. 노동력이 사라짐으로서 봉건제도의 축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와 같이 변하는 세상이 요구하는 ‘생산’에 부응할 수 없었기에, 서유럽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구도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옮겨진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노들에게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이 없이 ‘생산’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노예와 같이 일만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산을 위해 결정적 수단인 노동이란 가치를 지닌 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농도들이 장원 제도를 거부하고 그 곳으로부터 뛰쳐나오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돈의 힘이 가져온 결과였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수평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구도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사회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철저한 수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즉 모든 인간관계는 왕족, 귀족, 평민, 그리고 노예라는 계급질서 속에서 영위되었다. 이들 모두 태어난 신분대로 살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중 일부는 상승된 계급의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언제나 수직구도의 한계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새로 도래한 수평구도는 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자유와 평등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였다. 힘으로 억압하는 자들과 그 힘에 의해 억압당하는 자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제시한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은 수직구도 안에서 막강한 힘을 추구하던 로마가톨릭교회와 대조적이었다. 이미 수평구도의 적합성에 익숙해가던 서 유럽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인격적 평등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할 수 있었다.
돈과 교회
돈은 ‘생산’을 위하여 자본이 필수적이었다. 생산에 필요한 기계를 제조하고 재료를 구입하고, 무엇보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빌려주고 나중에 갚도록 하되, 이자를 얻어냄으로 부를 늘리는 자본가들이 등장했다. 물론 전에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금융의 시작이라 간주되는 고리대금을 통해 이윤을 챙겼던 업자들은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전통적으로 출애굽기 22:25, 신명기 23: 19-20, 에스겔 18:8, 누가복음 6:35 등에 근거하여, 고리대금 자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여겼다. 심지어 대금업자로 판단된 사람을 교회에서 파문하기도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중세 신학자들은 고리대금업자의 탐욕을 지적하면서 재산권을 침해하는 도적질로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중세 말 교회는 자본주의와 함께 돈을 가진 자의 힘의 등장을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답을 얻기 위해 먼저 15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은행에 대하여 알아보려한다. 지오반니 데 메디치(1360-1420)는 자신의 막대한 상속 재산과 아내의 결혼지참금으로 은행의 재산을 키워 대단히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르네상스 예술의 중흥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흥미롭게도 지오반니와 교황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였다. 메디치은행의 일반인이 아니라 그 당시 상류의 부자들, 즉 귀족과 성직자 등만 고객으로 삼았다. 그는 교황청이 필요한 돈을 원활하게 공급하면서 교황의 신뢰를 얻었다.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탄핵 받은 대립교황 요한 23세(Antipope John XXIII, 1370-1419)의 재정 자문이었던 그도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교황청의 재정업무를 전담하면서 유럽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이 항상 정직하고 투명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성직매매를 위해 교황을 매수하는 목적으로 지급되는 부정한 돈도 있었다. 교황청의 재정을 맡느냐에 것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철저한 신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대를 엄선하였다. 아무쪼록 16세기 종교개혁을 앞두고 교회와 돈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 사회가 자본주의체제로 전환되면서 돈의 영향력을 지닌 자와 교회의 관계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흑사병으로 노동력 사라져 봉건제 무너지고 자본주의 도래
돈 있는 자와 교회 긴밀 관계...1515년 고리대금업 합법화
돈을 가진 자의 힘
자본주의는 새로운 힘을 등장시켰다. 출신과 신분에 따라 결정되던 과거와 달리, 돈을 가진 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그 중심에는 야콥 푸거(Jakob Fugger, 1459-1525) 라는 대단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독일 농민 출신이었다. 그의 가족은 시장에서 직물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성직자가 되려 한 그였지만, 결국 유럽에서 독보적인 자본가로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중세의 수직관계의 구조에서 태어났으나, 그 틀을 깨고 자본주의로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과정을 주도한 것이다. 그는 돈 앞에 공평하기에 신분과 상관없이 빚을 진 사람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다.
푸거가 결정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것, 신성로마황제 프레데릭 III(Frederick III, 1415-1493)의 조카였던 오스트리아의 대공 지기스문트(Archduke Sigismund, 1427-1496)와 금전관계를 갖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대공은 언제나 낭비가 심했으며 중요한 전쟁이 치르면서도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 자금이 필요하자 제법 가치 있는 은광을 담보로 푸거로부터 거액을 대출 받았다. 결국 푸거는 은광을 소유하게 되었고, 채광된 은을 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리며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힘이 있는 정치인들과 밀착 관계를 맺었다. 황제 맥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의 개인 은행을 맡아 독일에서 로마로 가는 돈을 담당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거금을 빌려간 카를 5세(Karl V, 1500-1558)를 당당하게 대했다. 터키가 헝가리를 침범하자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치러 막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 지경에 있는 자신이 소유한 유럽 최고의 은광을 지키려고 의도 때문이었다.
돈을 가짐으로 막강한 힘을 지녔던 푸거는 교황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교황을 보호하는 스위스 용병을 위한 금액을 지불하였고, 쥴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의 교황 선출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기도 하였다. 교황은 푸거에게 교황의 화폐를 제조하도록 하였다. 은을 생산하던 푸거는 그 후로도 계속 교회의 화폐를 제조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푸거가 교황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보상이 있었는데,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에 죄로 여겼던 고리대금업을 1515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의 교서로 인해 합법화된 것이다.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를 대항하는 논쟁으로 잘 알려진 요한 에크(Johann von Eck, 1486-1543)가 직접 나섰다. 그는 오직 악한 의도로 채무자를 상대할 때에만 죄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에크의 상대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개념을 거듭 강조하였다.
결과는 무승부였으나, 실상 교황에게 칼자루가 쥐여 있었다. 결국 돈을 빌려줌으로 이자를 취하는 것을 정당화 새로운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 뒤에는 막대한 돈을 소유한 푸거가 있었고, 황제와 교황을 움직일 수 있었던 그로 인해 자본주의가 새롭게 출발한 것이다. 아무쪼록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대항하던 중세 말 교회는 돈의 힘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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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