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매우 복잡하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도 묘한 관계로 존속하였으며, 16세기 종교개혁 역시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졌다. 중세 말의 상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그 때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사 안에서의 진행과정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와 핍박을 피하지 않고 신앙의 핵심으로 받아들였다. 교회가 국가의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매우 순수했다. 오직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13년에 기독교가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되고 392년에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교회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것 이외에, 교회와 국가가 서로 공존하면서 각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동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세에 들어 서방교회는 위기를 기회로 잘 전환시켰다. 476년, 기독교 제국이었던 서로마가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다. 그러나 486년에 프랑크 왕국을 수립한 서방 세계의 실권자 클로비스 1세(Clovis I, 466-511)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그의 아내의 끈질긴 설득의 결과였다. 이 일로 인해 교회와 국가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결합될 수 있었다. 그 후로 기독교는 막강한 권력자의 보호를 받으며 서유럽의 종교로 자리를 잡아갔다.
800년, 프랑크 왕국 전성기의 통치자였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수여받는 일이 일어났다. 교회와 국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서로 상대의 신앙과 권위를 인정하며 각자 나름의 힘을 키워갔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들의 다툼과 외부의 침략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국가의 보호를 정치적 후원을 받던 교회는 내적으로 심히 부패하였다. 결국 유럽 전체를 장악하던 프랑크 왕국은 동 프랑크(독일왕국으로 발전), 중 프랑크(이탈리아 북부로 편입), 서 프랑크(프랑스왕국으로 발전)로 분열되었다.
혼동 속에 빠졌던 서유럽이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962년, 오토 1세(Otto I, 912-973)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수여 받은 것이다. 뛰어난 정치인이었던 그의 의도는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과 교회의 사정에 귀를 기울였으며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만족시켜주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친척과 측근을 교회의 주요 직분에 임명하여 교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은 과거 ‘서로마제국’과 실제적인 관계가 없다. 황제라는 지위도 마찬가지다. 다만 로마교황이 453년에 멸망한 동로마제국을 의식하여 오토 1세에게 유럽의 지배자라는 명예를 선사한 것이다. 그 후로 독일 국왕이 신성로마 황제에 올랐는데, 그 절차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독일의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야 로마로 가서 교황의 손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은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와 교회 사이에 미묘한 정치적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어찌 보면 교회가 국가를 이긴 듯하다. 그렇지만 국가가 교회에 진 것도 아니다. 그 당시 황제는 분명 국왕보다 높은 지위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던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황제는 교황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실리를 위한 것이었고, 교황은 황제의 머리에 손을 얹었지만 실상 그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관계는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항상 긴장감이 돌았다. 서로 대립하여 힘을 겨뤄야 하는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
중세 말 서유럽은 로마교회와 국가의 밀착 속에서 갈등과 회유가 지속되고 있었다. 힘의 쟁취를 목표로 하는 두 집단 사이에 색다른 힘을 지닌 세력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제후들, 즉 자신이 소유한 영토 내의 백성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의 등장과 함께 서 유럽의 정치 구도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과거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이민족이 침입하여 위급한 상황 속에서 부득이하게 이뤄진 것이다. 군주가 기사들에게 보호를 보장받는 대가로 봉신에게 땅을 제공하는 쌍무적 관계가 생겨났다. 중세 봉건제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또한 토지의 소유주가 된 영주는 자신에게 속한 봉토가 넓어지면서, 하층 계급에게 양도하여 경작하게 하는 장원제도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각 지방이 분권사회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상대적으로 군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로서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닌, 제후들의 통치를 받는 여러 연방들이 모여 이룬 연합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러한 정치 구도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운동이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1493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였던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는 막강한 힘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정치인이다. 무엇보다 그는 정략결혼과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외국과의 전쟁을 치러 자신의 영향력을 유럽 전체에 확산시키려 했다.
그는 황제 중심의 막강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원하였지만, 그에게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지방 제후들이었다. 새로운 힘으로 부상한 제후들은 황제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유지하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부 제후들이 정략결혼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149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스위스 연방과 전쟁에서 패했다. 그 결과 스위스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다. 독일의 제후들이 1500년에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황제의 권한 중 많은 부분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중앙집권적 정치를 실행하던 프랑스와 대조를 보인 것이다. 종교개혁이 싹트기 시작할 때에 츠빙글리의 취리히와 칼빈의 제네바 등 스위스 국가들은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상태였다. 독일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황제나 교황이 아닌 개신교를 지지하던 제후들의 보호가 가능한 상황에서 개혁자들이 활동이 가능하였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Karl V, 1500-1558)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왕국을 상속 받으며 권좌에 올랐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시기였다. 1519년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한 뒤 개혁사상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에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이 통치하던 영토에서 갈등하고 있던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관계에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Francis I, 1494-1547)와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그는 로마교황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프로테스탄트를 억제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교황이나 교황청 대신 개혁자들을 옹호하던 제후들의 눈치를 살펴야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이 등장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진 상황 속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다.
민족주의
중세 로마교회가 지녔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치적인 것은 물론 엄청난 돈과 토지를 소유했다. 자연적으로 지상명령보다 자신을 채우는 일에 심취한 결과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종교개혁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이 외에도 교황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형성된 일종의 민족주의가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된 1309년부터 1377년까지의 70년간의 ‘아비뇽 유수’가 있다. 로마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o VIII, 1235-1303)가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lippe IV, 1269-1314)에 의해 생포되어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한 달 뒤에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가 교회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308년,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 (Avignon)’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프랑스가 교회를 장악하고 7명의 교황을 자국민 중에서 선출하였다.
교황청을 로마로 옮겨와야 한다는 의견으로 인해 아비뇽 유수가 마감되었지만 교황과 관계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탈리아인 우르바노 6세(Urbano VI, 1318-1389)가 교황에 선택되었지만 교회를 장악하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반대하였다. 그 결과 교황 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함으로서 결국 2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서방교회의 대분열’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영국,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헝가리 등은 로마교황을 선택하였다.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 등은 아비뇽 교황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2명의 교황 사이에 갈등이 진행되는 동안, 대립 교황을 선출하여 결국 3명의 교황이 자신이 정통임을 주장하고 상대를 파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영적 혼동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황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생긴 것이다. 아예 교황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도 생겼다.
교황의 권위가 추락된 상황은 그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주의와 맞물린 민족교회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교회 재산과 연관된 사항들 그리고 종교적 문제에 대해 세속 통치자들이 직접 참견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적 유익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인해 교황청과 갈등하는 경우가 날로 증가되었다. 민족주의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더욱 묘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상황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covenantcho@yahoo.com
04.0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