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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6)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개혁으로의 길 

 

만일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이 50년 또는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성공적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이 가정에 대한 답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그 당시 전반적인 상황을 상세히 살펴볼 때,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전과 비교해볼 때 분명하게 달라진 상황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각 개인을 살펴보면, 후대 교회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할 훌륭한 인문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개혁적 열망과 신앙적 결단이 교회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운동이 성공한 이유가 대단한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만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의 손길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마치 세례요한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시키신 것처럼 개혁으로 향하는 길을 친히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의 마음에 개혁의 불씨를 심어주신 것처럼 역사적 배경을 주관하시어 큰 불로 확산되어 번질 수 있었던 환경을 조성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가장 현저한 변화는 개혁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개혁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바라보는 자들이 없었다면 16세기 종교개혁은 불발로 끝나버렸던지, 아니면 아예 시작조차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큰 나팔소리로 깊은 영적 잠에 빠져있던 신앙 지성인들을 흔들어 깨웠다. 개혁자들의 사상을 접한 뒤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향하는 길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였다. 특히 사상적 기초인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인문주의 사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 중심을 벗어나 인간 중심의 신앙관이 태동한 시기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중세 사회가 장시간 무시하는 상황에서 상실하였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 자체가 무엇을 대적하려는 의도가 동기가 되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가르침에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발견하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던 운동이다. 새롭게 인식된 과거 그리스와 로마가 지녔던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사상 

 

중세 십자군 운동이 1096년에 시작되어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054년에 동서 교회가 분열된 이후 서방 교회는 동방세계와 관계를 끊은 채 자신들만의 전통을 쌓아왔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지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재탈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웠지만, 사실은 종교적 동기 이외에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감행하여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명목과 달리 진행된 수치스런 사건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종교개혁과 연관되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을까? 동방 세계가 지니고 있던 다양한 유산들이 서유럽에 전달된 것이다. 십자군 운동 이후 서방 세계의 관심은 동방 세계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데 있었다. 종교적 동기가 아닌 매우 인간적인 목적으로 전쟁에 임했던 자들 중에는 약탈한 물건은 가져와서 이윤을 남기고 팔면 부를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십자군을 통해 서방 세계가 그리스를 중심한 비잔틴 문화를 만난 것이다. 이들이 처음 이슬람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이슬람은 매우 지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그리스를 침공한 후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였다. 서방 세계는 이슬람 문화에 대단한 유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고대 문헌과 예술에 담겨 있었던 새로운 사상을 얻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건너온 문화가 서유럽의 지역주의를 벗어나게 하였고, 나아가서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십자군 운동과 함께 신항로가 개척이 되어 경제권에 커다란 변동이 생겼고, 새로운 자원과 기술이 서유럽으로 몰려들어오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일찍 눈을 뜬 인문주의자들은 ‘ad fontes’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인문주의 운동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발전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중시하였다. 

종교개혁 환경조성의 길 르네상스 인문주의...동조자 생겨

교회부패상 문제시 할 근거 마련, 새 사상의식 수용 준비

암흑기 탈출 

 

인문주의자들의 눈에 중세 사회는 부패와 무지로 가득 찬 암흑기로 비쳐졌다.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던 사실로서 ‘신곡’으로 알려진 단테 아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265-1321)를 대표자로 들 수 있다. 그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황제와 교황 사이의 대립이 지속되던 상황을 지켜보면서 교회의 타락을 자신의 글에 담았다. 단테는 휴머니즘의 사상을 ‘신곡’에 담아 중세 교회를 도전한 것이다.  

인문주의자의 관점에서 중세교회를 암흑기로 평가하며 로마문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인물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이다. ‘인문주의의 아버지’ 또는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불리는 그는 이탈리아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고전 문헌을 수집하여 번역하였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서유럽이 고대 로마의 문명에 비해 어둠에 잠겨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페트라르카는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의 글에 관심을 가졌던 신앙인이었다. 그는 로마 문헌에 담긴 내용이 기독교와 결코 상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글을 접하는 독자들이 신앙의 증진을 위해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 무척 많아졌다. 나아가서 그와 같이 로마 문헌을 읽고 새로운 생각을 담아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가 ‘칸초니에레(Canzoniere)’에서 시도한 14행 서정시 형식은 후에 세익스피어를 포함한 문학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트라르카의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지 않다. 도리어 그가 개혁의 대상으로 여기진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독자들에게 그의 글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성경에 담긴 있는 깊은 영적인 진리를 통찰하는 일 대신, 자신이 인용하는 로마 문헌에 기록된 내용이 신앙을 확고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어두운 서방 세계를 향해 과거의 찬란했던 로마의 빛을 비추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했다. 

 

바른 길

 

단테의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중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신앙의 척도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간중심’의 개념을 소개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 역시, 복음이 아닌 로마시대를 빛나게 했던 인물들과 로마신화를 복음의 자리에 바꿔놓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주의는 매우 위험한 존재로 등장했다. 

그러나 서유럽은 인문주의가 보편화되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에도 인문주의는 인간의 존귀함을 인식시키는 일종의 도구였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대학에서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포함하여 고전어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고전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대한 관심도 증가되었다. 

중세교회는 철저하게 성도들이 교회를 의지하도록 교리와 예전의 틀을 구축하였다. 주는 것만 받아먹으라는 자세로 신앙인들을 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연구가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들이 점차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이런 상황은 종교 개혁가들에게 전에 없었던 기회, 즉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사명이 주어졌다.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인문주의는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였기에 그 당시 널리 알려진 교회의 부패상을 문제시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들에게 도덕은 반드시 실천이 동반되는 것이었다. 즉,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세 교회의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 없는 문제로 여긴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자들의 외침에 동조하는 세력이 준비되어진 것이다.  

둘째로, 인문주의는 새로운 날을 기대하는 역사의식 속에 진행되었다. 오직 교회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신앙을 증진할 수 있다는 틀에 갇혀있던 중세인들은, 자신과 사회의 미래 역시 교회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문헌에 대한 연구에 몰두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폭을 넓혀 심지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지리학 등에 관심을 배우고 가르쳤다. 상류층뿐 아니라 상인들까지도 이 지식을 공유하면서 넓은 세상에서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식을 키워갔다. 개혁가들이 주도하는 성경적 방식의 개혁은 그들과 친숙하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셋째로, 성경 중심의 복음에 입각한 신앙을 지닌 인문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문주의가 일반적으로 지향하던 ‘인간중심’이, ‘하나님중심’ 사상을 철저하게 지키던 자들에게는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을 각성하는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명을 가지고 성경 원문과 교부들의 글을 통해 성경적 신앙 체계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인문주의의 영향 아래서 개혁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문을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빈이다.  

covenantcho@yahoo.com

03.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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