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구원을 베푸는 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은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하지 않다. 학창시절 배운 세계사 과목 내용 중 유럽의 역사부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세유럽이 마감되고 근대사회로 연결되는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라고 소개한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어렴풋이 종교개혁에 대한 상식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극히 제한적이다. 사회생활의 일부분이거나,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탄을 받을 만할 뉴스거리가 많아질수록 교회에 대한 마음을 더욱 닫는 형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대한 설명 없이 16세기 유럽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당시 교회가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그만큼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세는 교회가 세상이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가 사회 전체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이다. 중세의 역사는 교회가 서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세속 정치와의 권력다툼의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교회가 이긴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교회가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자녀가 출생하면 세례를 반드시 받도록 했다. 유아세례는 그가 교회에 속한다는 표증이기 때문이었다. 왜 교회에 속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을까? 교회가 구원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중세교회는 다른 교리에 앞서 ‘교회론’을 논의하였다. 교회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중세 시대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위치가 확고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영적 유익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인 곳’이라는 개념보다 ‘구원을 베푸는 기관’이란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 개혁
‘종교개혁’을 영어로 ‘The Reformation’ 또는 ‘The Reformations’로 표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사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종교개혁’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이다. 뉘앙스에 따라 16세기에 일어난 개혁운동을 통칭하거나, 그 당시 개혁운동과 연관되었던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성공회 등의 다양한 분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현재 기독교 내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연 ‘종교개혁’이란 표현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원래 ‘The Reformation’ 이란 단어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바로 그 개혁’이라고 표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이 마치 그 당시 종교적 관점의 교정 내지는 부분적 수정 정도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 교과서를 작성하는 역사가들이 어떤 관점에서 종교개혁과 연관된 사건이나 인물을 소개할까? 이런 기회를 통해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이에 대항하여 생겨난 개신교의 장점을 세상에 알리려는 의도가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특정한 신학 전통이나 교파의 관점을 피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기독교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구교나 신교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한 종교 안에서 이뤄진 개혁운동으로 오판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류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교회개혁운동’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종교개혁’이라고 번역이 매우 훌륭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교회는 중세 유럽인들의 모든 것이었다. 그들의 종교였고 삶의 중심이었다. 개혁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수용한 자들과 거부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종교였던 교회 안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사실 교회를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확신하던 유럽인들에게 우리가 교회라는 매개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매우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혁자들의 편에 설 때 자신의 구원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의 성공 여부는 교회의 지시에 맹종하는데 익숙하던 신앙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데 있었다. 교회개혁은 결코 녹록한 사명이 아니었다.
세속정치와 권력다툼에서 이긴 중세교회는 ‘구원 베푸는 기관’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은 신학개념(성경보다 교회) 중점 둔 교회개혁운동
초대 교회
개혁자들이 개혁을 단행하면서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무엇이었을까? 교회 자체였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교회는 ‘구원의 통로’라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이 오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5세기 교부 어거스틴은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성경적 사실에 근거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중세 1000년을 지내면서 교회는 어거스틴이 정리한 교회관을 무시하였다. 베드로부터 시작된 사도적 권위가 계승되어야 참된 교회라며, 조직화된 절대적인 교회제도를 발전시켰다. 교황이 교회의 최고 위치일 뿐 아니라, 국가의 머리가 되어 절대군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가 개혁이 필요했던 이유는 초대교회의 원형적인 모습으로부터 크게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16세기 개혁가들은 결코 이상적인 교회를 꿈에 품고 운동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매우 단순하고 순수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의 주장 가운데 로마교회 관계자들을 가장 성가시게 했던 것은 개인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마치 구원이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쉽게 여겼다. 특히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여기는 환경 속에 있던 성직자들은 개혁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자들을 보고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중세 말 로마교회 안에는 진지한 신학적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전야에는 교회를 대표할 만할 신학자들이 없었다. 원래 중세신학을 주도하던 자들의 수가 매우 적기도 하였지만 성직자들이 신학적 고민보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하는데 더욱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자들로 인해 교회에 혼동이 찾아오자 로마교회의 전통에 젖어있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거의 유사한 반응이 보였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개혁자들의 활동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들이 무섭게 변했다. 초대교회로 환원하기를 원하는 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로마교회를 떠나면 구원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였다. 로마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을 칼과 불로 죽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초대교회에 있었던 순교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는 성도들이 개혁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를 찾아서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확신하던 성직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앙적인 부와 명예를 누리며 성도들의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던 성직자들이 개혁의 대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들은 개혁자들처럼 중세교회의 신학적 오류에 동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전통 안에서 교회가 도덕적으로 새롭게 되기를 열망했던 자들이다.
신학 개혁
16세기 개혁자들이 바라보았던 중세 말 교회의 모습은 참담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빠짐없이 강조하는 교황을 포함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문제시 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지적하며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비도덕적인 교회를 더욱 순수하고 정결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개혁자들은 성경을 잣대 삼아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평가하고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 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려 하였다. 그것은 중세교회의 신학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중세교회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을 신학의 오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개혁자들을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신학 때문이었다. 오직 교회가 구원의 통로임을 강조하는 중세신학은 성직자들의 위치와 역할을 절대화 시키는데 일조하였다.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가르침은 곧 사제들의 사역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 없이는 세례식과 성찬식 등 로마교회의 7가지 성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유일한 방도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중세 로마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직접 읽도록 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주장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긴 이유도 신학적인 동기이다. 그들은 교회가 성경을 산출하는 도구이므로 교회가 성경보다 당연히 앞서야 한다는 신학체계 안에 갇혀있었다. 그들은 오직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 받았기에 평신도는 성경에 대한 개인의 소견을 포기하고 사제의 도움을 받는 일에 충실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16세기 개혁자들은 신학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은 총체적인 도덕적 타락 속에서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지위가 확고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의 오류가 어그러진 삶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두터운 전통의 틀에 갇혀있던 중세신학에 대한 도전장을 던지며 개혁의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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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