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명기 5장 16절의 설교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대 역사에서 이교도들은 경건(pietas)이라는 단어를 아버지, 어머니, 우리를 돌보며 다스리는 모든 권위 있는 자들에게 적용했다. pietas는 적절히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다. 이교도들은 영적인 소경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섬김 받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순복할 때 우리의 순종의 태도를 시험해보시기 원하신다는 점을 알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행정장관, 기타 우리를 다스리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그의 인격을 대표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조소하고 거부한다면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다름없다.” 칼빈이 '경건'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사회적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높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복종, 헌신 등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종교개혁자 칼빈도 경건에 관한 그런 전통적인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명기 설교 중에서 "그래서 이교도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우리가 영예를 돌리는 것에다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경외입니다...."라고 말한다.
(8) 「요한복음주석」
이 책에서 칼빈은 이방인의 경건과 기독교인의 경건의 관계에 대해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pietas의 단어가 온 세상에 퍼져 있으나 무엇보다도 철학자들과 세속작가들의 손을 통해 탁월한 감정이 작품들 속에 나타나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9)「사도행전주석」17:28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는 시인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한다. 방탕한 자들과 진정한 경건을 멸시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아라투스의 말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놓은 지식을 고백하는 증거라고 표현한다.
(10)「복음서의 조화에 관하여」(공관복음 주석)에 있는 마태복음 12장 7절 주석
칼빈이 생각한 경건(pietas)에는 외면적인 의모도 내포되어 있다. 공관복음주석에서 칼빈은 안식일에 어떤 형태의 노동은 허용되었다고 말한다. 그 노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계된 일로서 이른 바 경건의 직무들인데 이것은 ‘종교적인 의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같은 단락에서 칼빈은 경건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위선적인 내용을 제시하면서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적들을 사용하여 경건을 유지하면서 실상은 육을 숭배하는 일에 집착함으로서 경건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위선자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11) 일률적으로 경건(pietas)으로 번역된 신약의 단어는 ‘유세이아(euseia)’이다.
이 단어는 목회서신과 공동서신에 독점적으로 나타나며 그 밖에는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한번 사용되었다. 서신서에 15회 나타나는 이 단어를 RSV는 세 번을 경건(godliness)으로 번역했다. 70인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지고 있는 의무 곧 경건, 거룩함, 종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2) 칼빈의 삶에 있어서의 경건
칼빈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어떤 특정한 성경구절이 있다는 뚜렷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로마서 1장 18-25절의 내용이 칼빈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부분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특히 로마서 1장 21절의 말씀이라고 짐작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중심주제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주제들은 「시편주석」서문에 있는 그의 개종에 대한 설명과 칼빈의 「사들레트 추기경에게 보내는 답변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고백에 관한 글에 나타난다.
3)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같은 칼빈의 경건
칼빈의 경건은 그 이전의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쟝 까디에는 "칼빈이 경건의 영역에서 이루었던 혁명을 동시대에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했던 혁명과 비교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쟝 까디에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지구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천문학자는 정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에 대한 모든 개념이 바뀌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경건에서, 그것의 습관적인 중심이었던 사람과 그리고 사람의 필요나 성과들을 들추어내고, 그 자리에다 경건의 진정한 중심인 하나님을 다시 모셨다." 까디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이었다. 중세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주체였으며, 그 인간의 요구나 필요, 종교적 성취에 따라 하나님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중심의 종교, 인간중심의 경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분만이 홀로 주인이며, 사람들은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과 종교, 그리고 그에 따른 경건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종교상의 대전환이었다는 시각이다.
중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은 인간의 종교적 수련이나 영성, 자선, 선행 등 행위를 그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종교적 수행 등 이른바 '공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선조들의 구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서는 구원을 인간이 공로로써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구원의 객체인 인간이 오히려 주체로 인식되기까지 하는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경건은 참된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실제로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은 그런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의미를 잃고 말았다. 바로 그것을 마르틴 루터가 10년여 동안의 고통스러운 수도원생활을 통해 체득하고,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또한 ‘경건’이란 단어 대신에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야 할 이유 중의 하나이다.
칼빈은 중세기적인 종교관행과 경건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기독교강요」를 비롯한 그의 여러 저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실천이 아닌 새로운 의미에서, 즉 복음적인,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 경건을 세워놓았다. 그가 세운 경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경건함으로써 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그런 경건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경건에 선행하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경건사상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경건은 칼빈에게서 인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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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