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올바른 기도의 방법 (2)
2)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간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친히 주신 다른 이름이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 불리워 지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며, 전능하신 주님은 자신이 우리 아버지이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심어 주신다(고후 6: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모든 복음적인 예배와 모든 우리 기도의 궁극적 대상이시다. 이것은 바울 사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한 성령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의미로 에베소서 2장 18절에 잘 표현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드러내시며, 우리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며 만족스러운 일이겠는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기도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인 하나님을 느끼며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도할 때 아버지라는 개념 아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그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만큼 본질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없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룩한 즐거움을 가질 수 없으며, 그 거룩한 즐거움이 없다면 삶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영적인 즐거움이나 만족감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3) 우리에게는 거룩한 곳, 곧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은 서로 반대 되는 것이며,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거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없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함은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1)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담대함(헬, 파레시아)’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상태나 조건, 원인에 따라 각각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위압감을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주어진 기도문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와 담대함의 영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 아버지께 자녀로서 참되고 진실하게 기꺼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 언제나 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는 유혹과 영적인 침체와 죄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를 게을리 함으로 인해 다양하게 방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신자들은 뿌리와 원리로서,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때 그것을 사용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고 담대하게 우리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일을 숨기지 말고 아뢰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라고 하셨다. 이것은 항상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2)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을 기쁘게 받아주신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기쁨을 가질 수 없으며, 그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자신을 숨기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기쁨도, 자유도, 참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할 때 성령을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런 확신과 담대함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드리는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와 자신들을 기뻐하신다는 거룩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에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든지 신자들을 받아 주시고 그들의 요구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들어 있다.
죄인들은 본성상,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고 근거 없는 생각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이런 저런 것들을 하실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과연 하나님께 가능할까? 라고 말하면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한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성령은 우리로 언약의 약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깨닫게 하며 우리로 담대하게 그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신다.
4. 성령은 기도할 때 신자들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받으시는 유일한 방법이요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하심
이것은 복음 시대에 기도의 근본적인 방향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구별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을 통해 가장 거룩한 곳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믿음과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와 관계에 대해 특별히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이요 우리를 받아 주시는 수단이요, 원인되심을 알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다. 실제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는 모든 기도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방법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라고 명확히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고,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말미암은 칭의(justification)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롬 5:2).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간구할 때 은혜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실제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로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령의 역할이 바로 ‘아들의 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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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