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올바른 기도의 방법 (1)
성령은 신자들의 지성에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 곧 기도의 내용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며, 그들의 의지와 감정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열망하도록 하신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 지성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빛을 가지지만, 의지와 감정은 이런 일에 죽어 있으며 관여조차 할 수 없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재능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전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행위이다.
1. 성령께서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서 사역을 완성하려 하실 때, 기도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향해 순종하도록 역사하심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에는 특별히 강하게 짓누르는 마음에 중압감으로 탄식하는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기쁨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의 부담은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의지와 감정을 움직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는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헬, 훼페렌튕카네이)”(롬 8:26)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쉬낱니람베네타이’를 사용하였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우리가 일할 때 도와주시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중보자로서 스스로 간구할 수 없는 자를 대신해서 간구한다는 의미를 가진 ‘휘페렌튕카네이’를 사용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도록 하신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탄식한다’고, 곧 겸손히, 슬프게, 간절히 열망한다고 말하고 있다(롬 8:23). 그리고 그는 또한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셔서 우리로 간절하고 애타게 우리의 기도해야 할 것을 구하도록 하신다.
2. 성령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에 세밀하게 관여하심
성령은 참으로 우리의 온 영혼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영적인 것들의 진실과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로 하여금 지성으로 이해한 것을 선택하고 사랑하게 하신다. 또한 우리의 감정으로 하여금 지성이 알고 의지가 받아들인 것을 즐거워하고 열망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효력으로 실질적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말할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것들이 완전히 성취되기를 원하는 간절하면서도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열망을 갖도록 하신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말로 겸손히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어 효력을 발생하도록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누리는 영광스러운 상태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라고 말하며,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복된 사역에 대해 로마서 8장 16절과 17절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롬 8:23) 스스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받을 때에,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바로 그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헬라어 “엔튕카네이”를 사용하는 반면에, 본문의 성령에 관해서는 “휘페렌튕카네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것에 어떤 것을 더해 주심을 내포한다. 주님께서 더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자신 안에서 언제나 완벽하게 활동하는 은혜를 더욱더 고양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기능들을 더욱더 힘 있게 사용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특별한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성령의 동일한 도우심과 동일한 은혜의 역사를 사모해야 한다.
3. 성령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하심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데 필요한 믿음, 사랑, 존경, 두려움, 신뢰, 복종, 기대, 희망 등과 같은 은혜를 불러 일으키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쁨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지도 않을 뿐 더러, 메마르고, 짐스러운 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도는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기도의 내용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거룩한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님들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다.
우리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즐거움에는 어떤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가?
1)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데는 육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는데(히 11:27), 이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 곧 어떤 대상을 믿는 자들로 분명히 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있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그를 즐거워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구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은 바로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 이시다(히 4:16).
더 나아가 이런 은혜의 보좌는 그것이 세워져 있는 장소로 인하여 더 큰 의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가장 거룩한 곳, 곧 지성소이다.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인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힘입어 담대하게 그분이 계신 성소로 나아가는 것이다(히 10:19). 그러므로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간구하는 죄인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그분의 보좌는 다르게 표현이 된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볼 때, 어리석게 그것을 피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그들 안에 두려움과 공포만 자아낼 뿐이다(사 33:14, 미 6:6-7, 계 6:16,17).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정당하게 고려하지도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이름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할 뿐, 아무리 하나님께 나아갈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신 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시기 위해 높아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사 30:18). 이것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으며, 기쁨으로 그분을 부를 수 없고, 자녀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도 없다. 우리가 은혜의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주어진 계시로부터 온다. 골로새서 2장 1절과 2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 안에 분노가 없으시다는 것과 우리가 화평하기 위해 자기 팔을 잡으면 화평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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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