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기도의 내용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1)
1.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시고 그 부족함을 기도와 간구 중에 하나님께 아뢸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기도와 간구 중에 우리의 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기도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1) 우리가 하는 기도의 주된 내용은 믿음과 불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해주소서”라고 기도했으며(눅 17:5),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했다(막 9:24). 만일 불신앙이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고 믿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면, 이런 것들이 주된 내용이 되지 않는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의 본질과 쓰임에 대해 확신을 가지듯이, 우리는 불신앙의 본질과 죄책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확신 없이는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주님은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특별한 사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우리는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기 마음과 영혼에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어도 복음이 정죄하는 불신앙의 본질과 죄책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우리가 마땅히 믿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복음을 거스리는 죄를 짓는 것이며, 복음을 통해 우리의 불신앙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양심의 빛이나 율법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의 불신앙의 죄책을 깨닫게 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우리의 어떤 본래적(innate)인 관념도, 어떤 율법의 가르침도 이에 도달 할 수 없다. 이렇게 깨닫도록 하는 것도 간구의 영으로서 성령의 사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불신앙의 본질과 죄책을 깨닫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본질과 필요, 효력과 쓰임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의 역사 없이 기도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기도의 모형으로 제시되는 대부분의 기도문들에서는 이런 것들이 거의 무시되고 있다.
2)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본질의 부패와 그로 인한 우리의 부족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리의 이해의 어두움과 무지, 하늘의 일들에 대한 생소함, 그로 인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의 소외와 어둠의 그늘과 탐욕에 사로잡힌 마음의 정욕과 그의 은밀한 활동과 같이 본질상 우리의 의지의 어리석음과 완고함과 비뚤어짐과 영적인 일들을 꺼려하고 싫어하며 갖가지 간계를 만들어 내는 이 모든 것들은 신자들이 고백하고 간구할 때 특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이런 간구를 자신들의 의무로 알고 경험상의 죄와 거룩에 관련해서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가장 큰 관심거리가 바로 이런 것들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이 이런 일들에 의해 마음이 거의 동요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에 관하여 자비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으며, 이런 문제들을 은혜로 제거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모든 신앙과 계획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대한 지식과 감각, 명확한 이해가 없이는 누구도 마땅히 구해야 할 바를 기도할 수 없는데, 이는 그가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스스로 얻을 수 없다. 우리의 본성은 자신의 타락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만큼 부패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 모든 필요성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고대 교회가 펠라기안(Pelagian: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 416년 정죄받음)을 정죄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경된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볼 수 없으며, 우리의 본성은 오만해서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으며, 어리석어서 그것들을 느낄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영적으로 보게 하며 관심을 갖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자신의 마음의 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추측할 수 없다. 이런 무지, 빛의 부족, 죄에 대한 깨달음, 본성의 부패, 심지어 변화된 사람들 안에도 남아있는 이런 잔재들은 그들의 열매와 결과, 효과들과 더불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것을 메마르게 한다.
그러므로 기도문 이상의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어진 단어들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된다. 기도문 안에는 자신들의 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본성의 부패와 마음의 내적인 악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조명이 없는 사람이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불가능한 말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의 기능들이 부패했다고 판단했다면, 즉 이성은 허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마음은 간계와 사악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의지는 정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이 어떤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경멸하면서 자신은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사람들은 사실상 때때로 잘못된 관념 속에서 영적인 것들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신적인 상식과 저속한 의복에 현혹되어 하나님께 예배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의 원천이며 생명이었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추구한다면 우리 감정의 부패와 영적인 것들에 대한 혐오가 우리를 허영과 무질서에 빠지게 할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불규칙한 이러한 감정들을 죽이거나 바꾸거나 갱신하지 않고 간구하는 사람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홀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하고 이런 것들에 민감하게 한다.
우리 감정의 영적인 불규칙성과 혐오감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만 식별된다. 사도가 영적인 일들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식별할 수 없다고 확신하여 말했다면(고전 2:14), 영적인 일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의 무질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도 영적인 일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 마음에 사랑이 심겨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감정들을 죽이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향해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신자들이 기도해야 할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도들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빛과 자각(conviction)이 아니라면 이런 일들에 대해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이런 일들을 모르는 사람은 기도의 생명과 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언약과 은혜와 거룩과 다른 특권들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통해 깨닫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영적인 개념이나 올바른 이해뿐 아니라 통찰력도 가질 수 없다. 이런 일들에 대한 인식이 없이, 어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기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기도는 세상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일 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결코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 아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빛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 더 나은 성령의 역사가 부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차이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약속을 따라 성령께서 더 풍성히 역사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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