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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개혁신앙 목회자(The Reformed Pastor)” (1)

이윤석 목사

들어가며

 

이 책은 이미 ‘참 목자상’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목회자들에게 익숙한 책이지만, 필자는 이것을 다시 청교도의 개혁신앙에 맞추어 ‘개혁신앙 목회자(The Reformed Pastor)’로 번역해 보았다. 이 글을 위해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이 편집한 ‘The Banner of Truth Trust’사의 The Reformed Pastor의 서문과 패커(James I. Packer)가 쓴 서론, 조엘 비크(Joel Beeke)의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 켈리 카픽과 랜들 글리슨의 ‘청교도의 고전으로의 초대(The Devoted Life- An Invitation to the Puritan Classics)’, 조복만 목사의 ‘참된 목자상’의 개요 등을 참조하였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목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350년 전에 출판되고 지금도 계속 출판되며 목회신학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백스터는 책의 첫 장에서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청중에게 지옥을 피하도록 극진한 관심과 열심을 갖고 백 번도 넘게 경고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 어떤 합리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거절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진리를 제공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은 진리를 등한시하고 악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먼저 청중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대로 하고, 청중에게 믿으라고 말하는 대로 믿고, 청중에게 제시한 구주를 먼저 충심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되도록 먼저 주의하라!”

 

I. 책의 출판과 초점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길다스 살비아누스(Gildas Salvianus): 개혁신앙 목회자’로 1656년 처음 출판된 후 1657년 곧 재판이 나왔다는 것은 이 책이 얼마나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스위스의 세인트갈교회의 목사, 조한 졸리코퍼(1633-1692)는 “훗날 신실한 많은 목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서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두 권의 걸작은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개혁신앙 목회자’라고 썼다. 이는 백스터의 목회 개혁의 효력이 국제적으로도 미쳤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백스터의 개혁 전략은 1650년대 분리파 교회들이 급성장한 교회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으로 세워진 것으로, 칼빈주의 목회 전통에 가장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특수한 목회 상황에 맞추어 수정되었다. 그래서 백스터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효과적인 설교를 하는 법과 함께 목회 훈련을 실천하고 전체 교구 교인들에게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함으로 그들의 회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17세기에 이르러 ‘개혁신앙 목회자’는 수많은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맞추어 편집되고 재출간되면서 이 책의 부피가 작아졌다. 이로 인해 이 논문이 처음에 나왔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 백스터의 목회사역의 전략만을 소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1776년 새뮤얼 파머(Samuel Palmer)는 원래 480면에 78면의 다양한 편지들까지 첨부되어있던 원본을 간단히 축약한 요약판을 출판했다. 이 책의 미국어판은 1810년 펜실베니아주 워싱턴에서 출판되었다. 오늘날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번역판은 1829년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이 요약하고 편집한 책으로 최근까지 계속 출판되었다. 

이 ‘개혁신앙 목회자’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 찰스와 존 웨슬리(Charles & John Wesley),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을 비롯한 수많은 저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펄전은 “아내가 주일 저녁마다 나의 나태한 마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그 책을 읽어주었다”고 고백했다.

 

1650년대 분리파 교회들의 급성장 상황에 직접적 대책으로 세워져 

칼빈주의 목회전통에 잘 어울려...성경 통해 목회상황에 맞춰 수정

 

 

II. 백스터의 생애와 시대

  

1615년 로우톤(Rowton Salop)에서 독자로 태어난 백스터는 도닝턴의 자유학교(Donnington Free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1641년 키더민스터(Kidderminster), 세인트메리교회의 영향력 있는 11명의 평신도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백스터는 그곳에서의 목사직을 수락했다. 세인트메리교회가 백스터를 그들의 설교자로 선택한 것은 평신도 중심의 경건훈련에 대한 획기적인 발걸음을 내딛은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국 시민전쟁(English Civil War, 1642-1651)에 참여하기 위해 백스터는 1642-1647년에 키더민스터를 떠나 군목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크롬웰(Olivia Cromwell, 1599-1658)의 신모범군(의회파의 New Model Army)을 섬기는 동안 친히 목격한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의 위험성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서 “힘을 다해 거룩함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또 백스터는 비록 분리파의 태도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합법적으로 인정한 교구제도의 폐단을 역설하는 급진 분리파들의 비판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했다. 

1647-1661년에 백스터는 회심을 이끌어내는 설교와 전체 교구교인들에 대한 개인별 교리문답교육과 목회 훈련을 실시함으로서 근본적인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백스터는 또한 경건의 일치를 위한 환경을 만들고, 종합적인 개혁목표를 촉진시키기 위해 우스터셔연합회(Worcestershire Association)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청교도 운동을 낳은 실천과 경건의 주제들을 강조하는 청교도의 대표적인 목사, 복음전도자, 그리고 저술가가 되었다. 

키더민스터에 사는 동안 백스터는 목회활동의 업적 외에도 47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1660년 왕정복고(Stuart Restoration)가 이루어지자 백스터는 궁정 예배당의 감독이 되었으나, 비주류에 속해 있는 비국교도 목사들 편에 서기 위해 그의 감독직을 사임했다. 

1662년 통일령(Act of Uniformity)이 내려진 이후로 그는 비국교들 가운데 보수적인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감금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1660년대 후반과 1680년대 중반에 비국교도들이 영국 교회 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그가 종종 영국국교회에 순응한 사실-지방의 영국국교회 교회의 주일미사에 참석했으나 성찬예식이 진행될 때에는 떠났다-에 대하여 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비국교도를 옹호하는 책으로부터 교회연합을 기원하는 책에 이르기까지, 고도로 복잡한 조직신학으로부터 가난한 자들과 자기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안내서에 이르기까지, 무려 87권에 달하는 다양한 책들을 발표했다. 

1689년에 관용령(Toleration Act)이 시행되고 2년 후인 1691년 12월 8일 백스터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런던에 장사되었다. 그의 출판된 135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 세 권을 선택한다면 1688년까지 12판에 돌입한 ‘성도의 영원한 안식, 1650년’, 1669년까지 13판을 찍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부르심, 1658’, 그리고 우리가 다루는 ‘개혁신앙 목회자’이다. 

hyojungyoo2@yahoo.com

04.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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