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요 주제- 하나님을 향하는 삶
첫 번째로 그의 주제는 극히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가 생각하는 신학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였다. 그는 신학이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삶으로 응답하도록 해야 하며 인간들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딛2:12)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한다. 본서는 근본적으로는 청교도적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명확성을 가지고 점차 그것을 체계화하였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책의 내용의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1)신학의 의의
이 책에서 표현되는 신학은 철저히 실천적 기독교로서 단순히 지성, 의지 또는 감정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열정적으로 사상과 삶이 실천적이고 생명적인 기독교의 단일체계임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신학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법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신학을 지식보다는 행동에 대한 학문으로 인지하였다. 칼빈이 행동하는 신앙을 지식보다 경시한 것은 아니지만, 칼빈의 신학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아는 지식에 초점을 둔 반면에, 에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학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신학의 목적은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으로 이끄는 데 있었다. 그에게는 실천적 신앙이 신학의 중심 항목이었다.
(1)하나님에 대해 사는 우리
“신학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다. 로마서 6장 11절에 ”너희도 너희 자신을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신학을 교리라고 지칭한 것은 이를 다른 분야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탐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유래된 분야라는 것을 명기하기 위함이다.
갈라디아 1장 11-12절에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하신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2)신학의 기본원리
다른 학문의 원리들은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이므로 감각적 지각, 관찰, 경험, 귀납법을 통해 발전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의 기본원리들은 연구와 근면에 의해 발전될지라도 본래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마16:17).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종류의 삶은 살아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삶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일치되어 살아갈 때 하나님께 대해 살아가게 된다. 갈라디아 2장 20절에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함과 같다.
행복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이러한 삶의 범위 내에 포함되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유조니아)이 행복하게 사는 것(유우다이모니아)보다 중요하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만족과 관련된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선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사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에 대하여 사는 선한 삶으로 정의될 수 있다.
신학을 지식보다 행동에 대한 학문으로 인지...복종으로 이끄는데 사용
신학의 두 부분 신앙과 순종은 실행될 때 결합하나 규범엔 서로 구분
(3)신학의 주제인 의지적 실천
더욱이 이러한 삶은 인간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행하게 되는 전인적인 영적인 활동이며, 분명히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기 때문에 신학의 고유한 최초의 주제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잠언 4장 23절에 “생명의 근원이 이(마음)에서 남이니라”라는 말씀대로 이렇게 의지에서 나오는 삶에서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신학이 사변적 분야가 아니라 실천적 분야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신학은 이를 특별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신학에는 이러한 최종 목적 혹은 그 목적에 연관된 수단들과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의 모든 내용은 실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삶의 실천이 신학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고찰되므로 경제, 도덕, 정치, 법 제정에 있어서 올바르게 사는 것과 관련된 보편적 진리에 대한 교훈들 중에 신학과 정당하게 관련되지 않는 교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고귀하며 궁극적인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파송되어 신적인 일들을 다루고 하나님을 지향하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으로써, 우리의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지침이며 총괄적인 계획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신학’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테오조니아), 하나님을 향하여 섬기는(사역하는) 것(테우르기아)이라고 부를 수 있다.
2)신학의 구분(부분들)
신학의 두 부분은 신앙과 순종이다. 디모데후서 1장 13절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지키고”라고 말씀한다. 아브라함의 신학을 구성하는 것도 창세기 15장 6절과 17장 1절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셨다. 바울은 명백히 신학의 정수를 지니고 있는 로마서에서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구분은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신 분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학의 고유한 관심인 영적인 삶의 시작 혹은 최초의 행위가 신앙이요, 두 번째 행위 혹은 신앙의 원리의 작용이 순종이므로, 양자가 신학의 진정한 부분들이며 다른 것들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율법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구약성경에서는 신학이 때때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전12:13).
신앙과 순종은 실행되어질 때 항상 함께 결합된다. 하지만 이들은 본성상, 그리고 이들을 규제하는 규범에 있어서는 서로 구분된다. 본성의 질서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신앙이 첫 번째 위치를 점하고, 영적 순종은 두 번째 위치를 점한다. 왜냐하면 새 생명의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생동적인 행위들이나 삶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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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