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라네커대학(University of Franeker, Netherlands)에서의 실천 강조
프라네커대학에서 11년 동안 재직하면서, 그는 프라네커대학을 청교도화 하는데 힘쓴 ‘박식한 박사(Learned Doctor)’로 명성을 가졌다. 에임스는 프라네커대학이 교리 면에서는 정통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실천면에서는 대다수 교수와 학생들이 충분히 개혁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믿음은 성경에 합당한 기독교적 실행을 실천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특히 교수들은 에임스의 사상이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의존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의지의 역할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하우스칼리지’를 개설하고 그가 대학에서 가르쳤던 강의와 수많은 신학적 논쟁들을 재구성하였다.
학장으로서 에임스는 경건을 강조하고, 주일성수를 역설하고, 성탄절과 부활절 휴가를 줄이고, 학생들을 위한 훈련을 강화시켰다. 에임스의 청교도적 개혁은 ‘1620년대의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프라네커대학에서 재직하는 동안 계속되는 강의와 부지런한 저작 활동을 통해 알미니안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신학과 윤리학에 있었는데, 그는 이 두 학문 모두를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된 경건의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보았다. 이때 그는 두 편의 걸작을 썼는데, “신학의 정수”와 “양심론”이다. 그는 그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신학 체계를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배운 라무스주의의 철학과 방법을 통합시켰다.
“신학의 정수”청교도적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교본
신학과 윤리학-경건의 삶 살도록 하는 하나의 통일된 체계
5. 에임스의 가르침과 생애
라무스주의란 16세기 프랑스의 개혁파 철학자 페트루스 라무스(Pierre de la Ramee, 혹은 Petrus Ramus, 1515-1572)가 전개한 철학이다. 라무스는 삶과 생각, 앎과 행함, 그리고 종교적인 삶에서, 신학과 윤리학 사이의 괴리로 규정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인위적인 궤변을 비판하며 교정하려고 하였다. 에임스는 이 위그노교도(Huguenot, 프랑스의 칼빈주의 기독신자)인 라무스의 사상을 자신의 작품 속에 융합시켜, 신학과 윤리학을 아주 자연스럽게 순종적이고 언약적인 삶의 프로그램 속으로 융합시켰다. 이런 에임스에게 배우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에임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요한네스 콕세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였는데 훗날 그는 에임스를 능가하는 언약 신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러나 에임스는 일부 학생과 교수들이 더 깊고 진일보된 개혁을 성취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구나 요하네스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1588-1644)가 주도하는 일단의 교수들은 에임스의 노력을 고의로 방해했다.
소수의 학자들은 에임스가 일반적으로 지성(intellectualism)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길에서 벗어난 의지중심주의자(voluntarism, 主意主義, 혹은 주의주의자,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의 교리에 있어서 지성보다 의지나 의지력의 역할을 더 강조하는 사상)인 것처럼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개혁파 신학의 범주 안에서 에임스는 기독교란 성령이 역사하고 생명력이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아는 참된 믿음의 그리스도인을 낳게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을 탐독할 때, 우리는 그가 개혁파 언약신학의 완전한 체계를 세운 최초의 신학자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632년 에임스는 친구 휴 피터 목사로부터 로테르담(Rotterdam)의 영국인 회중교회에서 공동목사로 함께 사역하자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가 그 초청에 끌렸던 것은 거듭난 신자들의 순결교육에 힘쓰는 독립적, 언약 중심적 회중에 대한 친구의 목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청교도 진영 안팎에서 이런 회중교회 원리들을 계속 펼쳐왔다. 1633년 여름 로테르담 남쪽을 향하여 여행하던 그해 가을에 마스강의 둑이 터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집이 물에 잠긴 후 병에 걸렸다. 그는 명성과 갈등, 첫 번째 부인의 사망, 재정적인 불안정, 영국 당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방해를 겪었으며 마침, 친구 휴 피터의 팔에 안겨 1633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끝까지 견고한 믿음과 승리의 소망을 놓지 않았다.
죽기 직전 그는 뉴잉글랜드에 이민을 간 친구,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1649)과 함께 하고자 했었다. 에임스는 뉴잉글랜드의 신학사와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거기에 가지는 못하고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나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매사추세츠, 살렘의 청교도 정착지로 이민을 갔다. 그의 아내는 에임스의 장서들을 가져갔고 이 책들은 하버드 대학의 최초 도서관의 토대가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그의 저술을 종종 에임스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초기 미국의 신학과 지성사에 있어서 윌리엄 에임스는 그의 신앙사상과 작품들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앙사상과 작품을 남겼다.
II. “신학의 정수”의 핵심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는 1627년 라틴어(Medulia Theologiae)로 처음 출판되기는 했지만 그 책에 담긴 주된 사상은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에 나왔다. 그가 1619-1622년 라이든에서 가정교사로 학생들에게 했던 신학강의들이 다듬어졌고, 그것들은 먼저 프라네커대학을 통해 단편적으로 라틴어(1623)로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 프라네커대학의 학문적 환경 속에서 재정적 안정을 찾게 된 후에 그는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완성시켰고, 오늘날 그를 가장 잘 기억하게 만든 작품이 되었다. 일반 성도들과 신학생을 위해 유용한 개론서로 쓰인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학계와 교회의 인정과 갈채를 받을 뿐만 아니라 다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어판은 1642년에 최초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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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