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칼빈과 그의 사상을 따르는 불란서의 라무스신학의 종합
그의 신학은 칼빈과 라무스신학을 종합한 형태이다. 그에게 축복받는 삶이란 하나님의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윌리엄 에임스는 축복과 행복을 결합시켰고,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 1번 문항이 된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퍼킨스의 명제는 유기된 사람들이 소유한 일시적인 믿음과 오직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갖는 구원하는 믿음을 대조하여 어떻게 사람이 유기되지 않고 택함 받았음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도록 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교회에서는 높이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그의 이중예정론은 알미니우스(Alminius)와 예정론을 반대하는 네덜란드의 목사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구분의 선구자...성화에 초점맞춰
영국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기초 놓고 후진에 큰 영향
5)비판
퍼킨스의 예정교리에 대한 변호와 논증은 칼빈의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가 서술한 구원의 서정과 구원의 확신에 내용도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것이다. 다만 퍼킨스는 그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화를 시킨 것이다. 이렇게 체계화를 한 목적은 사변적인 논증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이유인 목회적 적용을 위한 것이었다. 개인을 위해서는 자기 점검을 하게 하고, 목회자에게는 회중을 영적으로 분별하여 교회에 위선자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은 “황금사슬”의 첫 장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는 그의 신학의 정의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신학이란 영원한 복된 삶의 학문이다.” 그의 신학이해도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신학이 직접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교회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켄달(R. T. Kendal)은 퍼킨스의 구원론이 칼빈의 정확한 가르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지적한다. 칼빈의 선택여부에 대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였지만, 퍼킨스는 자신의 성화를 바라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는 베드로후서 1장 10절,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유효한 소명의 대상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양심에 집중시켰다. 또한 칼빈은 신앙의 대상과 확신의 근거를 일치시켰지만, 베자와 퍼킨스는 신앙의 대상(그리스도의 죽음)과 확신의 근거(성화)를 분리시켰다.
그는 작정의 순서인 타락전 예정설을 주장하면서, 그의 “황금사슬”에서 베즈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선택된 자나 유기된 자가 모두 아직 꼴을 갖추지 않은 덩이로부터 예정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구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신학자인 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서를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영국에서 “기독교대요”로 번역되어 퍼킨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켄달은 우르시누스의 가설적 개념인 행위언약이 퍼킨스에게 차용된 셈이라고 지적한다.
우르시누스로부터 차용된 용어인 실천적 삼단논법은 믿음의 중심을 선한 양심에서 찾았고, 이 양심이 이 원리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주관주의와 자기반성으로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 끼친 영향
그의 가장 큰 영향은 미국의 청교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게 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제자였던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는 퍼킨스와 칼빈이 가진 지식중심의 신학에서 의지중심의 신학으로 이동하였다. 임종 시 퍼킨스를 방문한 새뮤엘 워드(Samuel Wards)는 그의 일기에서 '하나님은 그의 죽음이 대학에 돌이키기 힘든 손실이며 크나큰 심판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를 대신할 인물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존 코튼은 퍼킨스의 설교에 대해서 번민을 가졌고, 퍼킨스의 사망에 대해 은밀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16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로서 영국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기초를 놓았고, 이후 미국, 네덜란드, 유럽 등 서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4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겨 놓은 방대한 분량의 저서들은 이후 청교도 시대의 엄청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또한 설교와 신학의 가르침을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후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그의 제자가 된 청교도 학자로서 “신학의 정수”를 쓴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등이 있고, 그의 설교와 신학적인 감화를 통해 많은 영향력 있는 청교도들, 곧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존 카튼(John Cotton),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등이 대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청교도 설교학의 교과서로 퍼킨스 이후 위대한 청교도 설교자들을 배출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 외에도 청교도 구원론의 기초가 된 “황금사슬”, “목사의 소명”, “소명론”, “기독교 가정”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계속 후대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윌리엄 퍼킨스가 당대에 끼친 영향은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이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 “온 도시가 퍼킨스 사역이야기로 가득했다”는 말에서 능히 알 수 있다. 그는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가 언급한 것 같이 청교도를 이론적으로 다듬고 정교하게 했으며, 영국 교회의 후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뒷받침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에서 설교의 모범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을 청교도 설교의 원리로 공식화했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공적예배규칙서”에서 가장 훌륭하게 균형 잡힌 표현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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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