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속고 속이는 삶(19-28세): 마니교와 아리스토텔레스
그가 수사학 선생을 하면서 마니교에 빠져 유혹하고 유혹받거나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한다. 수사학 교수였던 그는 명성을 얻기를 소망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는 친하게 지내던 총독과 절친한 벗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성술, 즉 속임수에 빠져 생활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중 고향의 친한 벗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친구의 죽음으로 한동안 슬픔에 빠져 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떤 사람이든지 유한한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오로지 불행과 슬픔뿐이라는 깨달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안식할 자리로 여겨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안과 사랑의 기쁨이 샘솟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과거로 지나가시지 않으시며, 언제나 한결같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평판에 휩쓸리어 누군가를 사랑하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진리에 서지 못한 영혼들의 특성을 파악한다. 이런 영혼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전존재가 흔들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진리 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을 인간에 빗대서 변화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던(교만한)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한다.
신실한 기독교도인 어머니 모니카는 이것을 한탄한다. 그는 유한한 것은 유한한 것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 감각적인 것은 꿀과 같다고 비유한다. 1)그는 마니교도들(사교)에 의해 속고 있었다(인생은 유혹). 2)학생들에게 속임 없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재주를 가르치는 것으로서의 수사학의 폐해를 말한다. 3)그는 점성술에 의해 속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성술이 사기임을 말하며,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의 운명도 다르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책임성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이나 생각이 아니다. 4)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불안해져 영혼이 감각적인 것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숲이나 놀이(시각의 만족) △노래가 있는 곳(청각의 만족) △향기 나는 정원(후각의 만족) 라)훌륭한 잔치(미각의 만족) △향락의 침실(촉각의 만족) △글과 시를 읽는 곳(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을 경험해본다. 5)그의 결혼은 유한한 것은 유한하게 사랑한다는 것이며, 감각적인 쾌감은 혼을 속이는 것으로서 진단한다. 또한 슬픔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일시적인 해결(장소의 변화, 시간의 흐름, 새로운 친구의 위로)을 꾀하고 있다고 밝힌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마음은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사람의 인기와 평판에 의한 판단 때문이라고 말한다. 6)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말하는 그는 “나는 빚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내 얼굴은 빛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행복 만끽할 수 있어
성경은 믿음 통해 볼 때 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돼
제5권 전환점(29-30세): 수사학교수와 암브로시우스
그는 자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5권을 시작한다. 뒤이어 1)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으며 누군가 주님을 버렸어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어 위안을 주신다고 고백한다. 2)그는 29세 때 카르타고로 마니교의 감독인 파우스투스가 왔던 일을 회상하면서 마니교와 자연철학자(천문학자)들의 학문을 비교한다. 이 둘 중에서 그는 철학자들의 이론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세계를 바로 인식하고 판단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세계를 관찰함에 있어 하나님과 자신들의 재능의 근원을 알지 못했고 주님께 자신들을 헌신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발전시켜 그는 참 행복은 창조주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3)그는 경건의 지혜를 모르고 마니 스스로 주님의 보혜사 성령이라고 거짓 증거하였던 마니와 더불어 마니교의 교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당시 자연철학의 내용들과 불일치하는 마니교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는 그런 의심들을 마니교도들에게 털어놓고 함께 해결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면서 감독인 파우스투스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언변과 화술에는 능통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마니교도들과 다를 바 없었던 파우스투스를 보고 실망한다. 그리고 그가 파우스투스에게 의심했던 여러 문제들을 털어 놓을 때마다 그의 무지와 겸손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역시 마니교도들 및 성직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관계가 나중에는 그가 마니교로부터 떠나려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때 그는 회의론을 이야기하던 아카데미파와 접촉하게 되면서 마니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진다.
4)파우스투스 감독을 만난 후, 마니교를 떠나기로 한다. 5)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를 떠난다. 좋은 학생을 찾아서,좋은 보수와 자리, 피난처를 찾는다. 6)로마에서의 교수생활을 하면서 회의에 빠진다. 여기서 로마 학생들에 대해 실망감을 나타낸다. 7)밀라노 제국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거기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만난다.
그가 훌륭한 암브로시우스 감독(340-397)에게서 배운 진리들이 많은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불합리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은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문자의 뜻과 문맥을 살펴야 한다. △성경해석의 기준은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성경해석은 사랑의 왕국으로 인도되도록 사랑의 덕을 함양하도록, 교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의 성경해석의 독특함은 성경을 연애편지를 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부탁은 윤리적 요청과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은 망원경과 같다. 육안으로 볼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보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망원경으로 나를 보고 계심을 발견한다”라고 말한다.
제6권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듣고(30세): 기독교 진리의 점차적인 발견, 인생규범 숙고.
1)그는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의 설교와 가르침에 의해 점차 기독교 신앙에 눈을 돌린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성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즉 성경은 문자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문자 너머에 있는 진정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경을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믿음을 통해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은 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진리를 발견하게 해주는 통로가 된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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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 당시 그는 여전히 헛된 행복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명예와 돈과 결혼으로, 세상의 행복들을 점점 쫓을수록 아주 쓰디쓴 곤경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이제 그는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라는 친구의 삶과 그들과의 대화를 고백하면서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습관의 폭력을 다룬다. 그의 습관을 버리는데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진리와 지혜를 추구했으나 결국은 세상의 것들을 버리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확실한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3)그 뒤 결혼을 위해 동거녀를 떠나 보내야했던 일, 약혼녀와의 결혼을 기다리는 2년 동안에도 습관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다른 여자를 취했던 일들을 고백한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했던 일과 어두워진 눈으로 인하여 사랑의 목적으로 삼았어야 할 덕과 미의 빛을 식별하기보다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던 것을 회고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빗대어 하나님 안에서 평온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죄 많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4)신앙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알고 믿는가? 믿고 아는가?”를 분명하게 서술한다. 왜 믿음으로 출발해야 하는가? 알면 믿을 필요가 없으며 믿음이 아는 것보다 먼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유한(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미숙한 존재(어린아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죄인은 눈병을 가진 사람과 같이 눈병이 고쳐져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믿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믿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믿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이 삶의 근본이며 믿음이 진정한 본능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믿음의 부정적인 면을 구분한다. 그것은 △덮어 놓고 믿는 믿음인 맹신(盲信) △미로에 빠져 잘못된 믿음인 미신(迷信) △정신을 빼놓고 믿는 미친 믿음인 광신(狂信), 그리고 △병적인 믿음인 불신(不信)을 말하며, 무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왜 믿어야 하는지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며, 믿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앙이 앎을 앞서며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부모가 나를 낳은 것을 처음에는 알 수가 없지만 믿고 살다보면 나의 부모임을 알게 된다는 실례로 증명해 나간다.
5)자신의 고민에 대해 고배한다. 성공과 행복의 조건으로서 명예와 돈과 결혼(성)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길에 장애물임을 언급한다. 그는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과 거지와 같은 점은 행복을 추구하는 면에서는 같다고 한다. 다른 점은 “△자기는 지식인, 거지는 거지이다. △자기가 추구하는 행복은 거지가 추구하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불안과 근심이 있으나 거지는 명랑하다. △거지는 술이 깨면 제정신을 차리지만 나는 깨어나지 못한다. △거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적선의 기회를 줌으로서 복을 받게 하지만 나는 땅에 속한 것에서 만족을 한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고발해야 병든 영혼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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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