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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배운다: 재림과 준비를 위한 새로운 교회 교육]

이희갑 목사 (Azusa Pacific University교수)
이희갑 목사

(Azusa Pacific University교수)

새해의 꿈과 소망 

 

2025년 새해가 밝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새해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 올해는 더 큰 소망과 꿈을 꾸게 된다. 왜 일까? 아마도 지난해의 여정이 너무 힘들었고 우리의 삶이 매우 고단해서 그러지 않을까? 그러나 새해도 아침마다 똑같은 해가 떠오르고, 하루 24시간의 흐르는 같은 시계소리를 듣고서야 우리는 새해에 대한 새로움을 망각하고 일상적인 시간이 자신을 지배하는 예전과 똑같은 삶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연 새해는 희망적일까? 희망은 어쩌면 외부 현상에 대한 다른 기대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 현상에 대한 내부 자각을 새롭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외부의 현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둠의 세력은 항상 존재했고, 사람들은 늘 갈등 속에서 살았다. 영적 어려움과 시련은 늘 크리스천들을 유혹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믿음을 더 견고히 하거나 혹은 불신앙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동일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이 세상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현실의 안락을 추구하는 대다수 사람들과 영원한 진리의 가치를 추구하고 미래의 소망을 추구하고 살아온 소수의 사람들, 두 가지 유형은 창조 이후 지금까지 동일한 패턴으로 계속되어 왔으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어떤 부류에 속할 것인가? 전적으로 각자가 선택할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2025년 교회 교육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가 세워지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노아에게 받은 교훈 

 

노아의 시대도 바로 그랬다. 현실의 안락을 추구하고 살아온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관은 점점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치관을 오염시켜 나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은 점점 죄에 빠져들고 있었고, 세상적인 가치가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 6:2) 

많은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들로,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통의 불 경건한 자들의 후손 (경건한 신앙이 없는 인간의 딸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구별되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혼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들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육체적 감각을 만족시켜 줄 목적으로 여자들을 보았고 곧 세상의 문화적 시각을 가지고 부패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처음에 셋 족속은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성을 잃지 않고 계속 번성해 갔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셋 가계 내에서도 세속의 가치관에 동조하며, 죄악된 문명에 친숙해 가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한 불경건함이 셋의 후예들에게도 깊숙이 침투하여 마침내 그들마저 세상문화에 완전 동화되고 말았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의 육체가 되었다”(창 6:3)라고 지적한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세상 문화에 동조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뿐임을 인식해야 한다.(마 5:13) 그 결과가 바로 창세기 6:4에서 기록한 네피림 숭배사상이다. “당시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장부라는 의미이다. 힘이 세고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사람, 세상문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매력적인 사람, 요샛말로 아이돌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그의 자손인 셋을 통해 거룩한 자들로 선택하셨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네피림을 선호하고, 그러한 세상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들의 눈에 얼마나 세상 문화가 좋아 보였을까? 영화 배우처럼 잘 생기고 성적인 매력이 충만하고, 부자인 네피림을 선호하였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계속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가 되었다”(창 6:4)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용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인 그들은 일시적인 문화와 세속적인 가치에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되었으니 비록 세상문화를 추구하고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살게 되었을 지는 몰라도 그들은 악인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이 땅 이후의 영원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 자손들 역시 같은 멸망의 길로 안내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을까? 하긴 어디 처음부터 악한 인생이 있으리요. 그들도 처음에는 세상 문화와 가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점차로 그들을 사모하고 동경하고 이제는 세상문화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즐겨하게 되었다. 육체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전형인 것이다. 

이것이 비단 노아의 시대에만 일어난 일이었던가? 오늘날은 어떤가? 크리스천 가정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기독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어떤 믿음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혹시 SAT시험 잘 준비하라고 주일날 교회에 오지 못하도록 관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이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을 위해 부정적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보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자녀 앞에서 홀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명심하자. 바로 이것이 용사요 네피림의 행태였고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는 사실을…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5-7) 세상 심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명을 위해 사용된 사람이 바로 노아였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한다. 내 재능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비관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아 앞에서 세상이 썩었다고 좌절하거나 비난하지 말자. 노아는 온갖 부조리, 악행, 포악, 불신앙의 시대에서도 꿋꿋하게 120년간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참으로 죄악의 물결 속에서도 세상과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믿음안에 거한 멋있는 사람이었다. 노아가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충실하게 실행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위대한 교육자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 

노아: 의로운 기독교 교육자 

 

그렇다. 무엇보다도 노아의 위대한 점은 바로 그는 의로운 아버지였고 교사였고, 믿음의 선조였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혼탁하고 자녀들에게 세상문화를 가르치고 동조하는 셋의 후손들과 달리 그는 자녀들을 믿음안에서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노아도 그렇지만 노아 아내도 대단히 훌륭한 여인이다. (우리는 그녀 이름도 모른다). 노아는 500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창 5:32) 참으로 나이가 들어 낳은 세 아들들, 그 세 아들들이 얼마나 소중했을까? 얼마나 잘 키우고 싶었을까?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모든 위세와 권세, 힘과 능력을 가진 자들로 키우고 싶은 욕망이 그들이라도 없었을까? 오늘날도 그렇지만 노아가 살던 시대에 가장 큰 재산은 자식이었다. 당시 세상의 풍조가 네피림처럼 기골이 장대한 남자아이들을 선망했고, 용사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문화의 아이돌이 중시되었던 것을 감안할 때, 노아도 그렇게 세 자식을 키워 보리라 하는 유혹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단호했다. 그는 세상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 자식들을 무장 시켰다. 그는 집에서 아이들을 성경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아마도 노아는 인류 최초의 홈 스쿨을 운영한 사람 아니었을까? 노아를 보면서 든 한가지 의문은 혹시 세 아이들이 아버지의 교육방식에 저항하거나 반기를 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자신들도 네피림처럼, 용사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세상문화에 순종하며 출세를 꿈꾸며 나아갔던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세 아들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끝까지 순종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다가오는 홍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한치의 의심도 없는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죄악이 창궐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죄에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그럴싸한 이유로 변호한다. 나의 죄는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저 사람에 비해 얼마나 깨끗한가? 세상 문화가 그런데 나 혼자 깨끗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의 작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 하시겠지. 아무도 보지 않은데 괜찮을 거야, 이번 한번만이야…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늘 생각했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문화보다 영원한 소망에 더 가치를 두었다. 자신은 이 세상에 잠시 있다 가는 나그네지만 영원한 나라의 백성임을 그는 확신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인 영달을 꾀하거나 잠시 나그네 삶에 필요한 안락을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있으며 곧 오리라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하며 증거하였다. 노아의 시대에 산 밑에서 모든 사람들이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 만드는 일을 120년간 지켜보았다. 그들은 평소에 세상 문화와 타협하지 않은 노아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확실하게 경험하였다. 그리고 곧 홍수가 있으리라는 노아의 메세지를 끊임없이 듣고 또 들었다. 훗날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증거한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 24;38-39) 120년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한 종류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과업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쉬지 않고 전했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홍수가 쏟아진 날,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이 상황이 어디 노아 때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지금 이 시대에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당시 악한 세대와 문화에 동조하지 않고도 믿음안에 올바로 선 교육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사실을 노아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악한 세대에 노아의 의로움이 자식들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아버지의 믿음의 결단에 그대로 순종했던 세 아들들도 참으로 괜찮은 자식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노아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아니해도 믿음안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얼마든지 올바로 키울 수 있다고 증거해 주는 의로운 기독교 교육자이다. 노아와 그의 아내도 자녀를 성공적으로 양육했고 그들의 세 자녀는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했고, 곧 그들은 인류의 조상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세상의 문화를 좆던 모든 사람들은 결국 홍수에 매몰되어 다 죽고 말았다. 한 아버지의 의로움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구원받는 역사는 오늘 이 시간에도 가능하며, 한 사람의 의로운 리더가 한 나라를 구원한 사례는 지금도 유효하다. 새해의 교회 교육은 바로 이런 의로운 교사에 의해서 미래의 세대가 일시적인 세상 문화를 추종하기 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기를 기도한다. 결국 그 힘은 기성 세대가 의로운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내가 믿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우선하는 신앙을 가진다고 하지만 혹 내가 아직도 세상문화에 취해 있지 않는가? 신앙도 좋지만 세상 가치도 추구하는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차지도 덥지도 않은 무덤덤한 신앙으로 인해 오히려 나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차세대 아이들이 혼미한 신앙이 되지는 않은지 오늘 내 신앙을 점검하자. 

 

크리스천 교육의 소망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어두울 때 더욱 빛을 발하고 힘들 때 더 큰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새해 큰 기대가 있지만 그러나 새해도 역시 우리에게는 어려움과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여전히 문화의 힘은 거대한 쓰나미처럼 크리스천들을 유혹할 것이고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가치를 따르지 말고 세상 문화를 순종하도록 계속 속삭일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며, 주님이 곧 오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목적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이런 영생의 관점을 심어 주기 보다는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너무 매몰되어 있고 지나치게 개인의 성취와 이 세상의 성공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크리스천 교육은 자신과 이 세상이 중심이 아니라, 진리가 중심이고 하나님의 가치를 아이들 가슴속에 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크리스천들에게 이 세상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이며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영원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 땅은 우리의 선교지 이며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임을 명심하자. 2025년 새해는 노아와 같은 의로운 교육자가 교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노아와 같은 인자한 아버지가 가정에서 자녀를 아름답게 가르치게 되기를 기도한다.

hlee0414@gmail.com

01.0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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