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는 어른을 ‘다 자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자랐다는 의미는 몸 즉 신체가 자란 것을 나타낸다. 마음과 그 성품의 여부는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만 커졌다 하여 어른이라 하기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가 만들어져 극장에서 상영이 되며 인터넷에도 소개가 되고 있다. 왜 굳이 ‘어른’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어른을 사전이 설명하는 대로 신체가 다 자란 사람 모두를 나타내고 있다면 이는 특별한 누군가만을 지칭해서는 안 될 것인데도 말이다.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를 보면서 나는 먼저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이를 전하고 가르쳐야 될 목사요 선교사며 성도인 나를 그와 비춰보니 ‘너, 하나님의 사람이 맞아?’ 하는 자각과 자책이 나를 때렸다.
‘어른 김장하’를 소개한 기자는 오랫동안 이 시대의 악인들을 찾아내 정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그 일에 몰두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더라고 했다. 그러다 문득 어둠을 헤치기보다는 빛을 드러내는 것이 어떠랴 싶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이 시대의 의인(?)을 찾아 암울한 세상을 비춰보려 했단다. 그 중 한 분이 ‘김장하’란다. 내가 영상으로 본 그분 김장하는 꼭 성경에서 묘사한 우리 구주 예수님과 비슷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체구도 왜소했고 걷는 것도 당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서 컸다. 신체가 큰 것이 아니라 마음이 컸다. 그는 수십 년 동안의 선행을 소개하려는 수많은 인터뷰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듯하다. 다큐가 만들어진 것도 인터뷰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둔 세상을 밝은 빛으로 밝히겠다는 기자의 집념으로 기록하고 편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른 김장하’의 종교는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분이 성경을 아는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분을 소개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그분처럼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울림으로 먹먹했다.
그는 자신은 호의호식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평생 차를 한 번도 소유하지 않았고 보기에도 굽이 거의 닳아 편해 보이는 구두를 신고 조밋조밋 걸어 다녔다. 그럼에도 수백억이 넘는 학교를 정부에 기증하고 권력이나 친족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으로 당당했다. 그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했으나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자가 못되어 죄송하다는 편지에 세상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오히려 격려하는 너그러움과 당연함도 있었다.
그가 만약 기독교인이었다면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들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를 고백하는 하박국 선지자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며 남의 잘됨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있는 사람이 어른이 아닐까 싶다. 신체는 커졌으나 사람다움을 간과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당연히 내 것이라며 팔을 안으로만 굽히려 드는 세상에서 남의 편에 기꺼이 서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나를 내세우며 드러내고 싶어 받은 것을 고마워하며 손을 치켜세우는 사람에게보다 받았으면서도 어찌 감사할지를 몰라 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작은 자들을 대접함에 인색하지 않은 그분의 일생을 보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보다 더 갖은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상에 대해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이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24년 새해가 밝았다. 교회와 성도들이 표어와 목표를 어떻게 정했을까가 궁금해진다. 거창한 계획을 세운 뒤 매년마다 수정하며 뒤로 미루기보다, 작은 하나라도 알찬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의 기쁨을 입어 작은 것에 충성했으니 큰 것을 맡기시겠다는 그런 칭찬을 받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고백하며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두드리심에 문을 여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새해를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세상에서의 어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른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입는 새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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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