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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수상한 세상

김한맥 선교사

(문화동원연구소 대표)

세상이 참 어렵다. 여기서의 어려움은 힘들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아서일 게다. 인생은 고(苦)라는 말도 있으니 세상의 중심인 인생의 고는 곧 세상의 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고달프면 사람은 멀쩡한 세상을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렵거나 힘든 가장 큰 원인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불신자의 대다수는 이 세상을 돈이 없어 어렵다고 말한다. 돈에 대한 욕구는 처한 상황과 상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자가 양 한 마리를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백 마리를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니 돈에 대한 욕구는 의식주의 절대 필요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돈의 용도는 쓰기 위함이지만 돈에 대한 욕구는 쌓아두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셨다. 쓰지도 먹지도 않을 것을 구하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위배된다. 무엇보다 당장 필요한 자들의 것을 취하여 쌓아두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다. 눅12:13-21에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었으나 쌓아둘 곳이 없어 작은 창고를 헐고 커다란 창고를 새로 지어 거기에 곡식을 가득 쌓으면서 자기 영혼에게 이제부터는 아무 염려나 걱정을 하지 말고 실컷 먹고 마시며 그 부를 누리자 했으나 하나님이 그 밤에 그를 불러가셨으니 그가 쌓아둔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욕심은 멈춤이 없다. 

요즘 한국은 LH 직원들과 기득권자들의 투기의혹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개발정보를 이용하여 부동산을 사들여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에 대한 비난과 성난 민심이 들끓고 있다.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돈벌이가 있어 내일 천만금이 생긴다 해도 당장 돈이 없다면 언감생심일 뿐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을 만큼의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가져 쌓아두고 누리기 위해 불법 부당한 진면목들이다. 백을 채우겠다는 욕심의 끝(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신자 특별히 기독교 성도들은 사랑이 없어 어렵다고 여긴다. 사랑은 사람들이 입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일 것이나 정작 세상엔 사랑이 부족하다. 왜일까? 사랑은 사랑이라 쓰고 희생이라 읽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엔 반드시 희생이 전제된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사랑의 정의가 된다.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닮고 따라야 하는 성도들조차 사랑을 입으로만 하려 한다.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초가 녹고 기름이 닳아야만 된다.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야만 한다. 어는 것도 말로만 되지는 않는다. 성도들은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또는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라는 찬송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을까를 묻고 싶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사랑은 참는 것이며 사랑은 내가 죽는 것이라면 사랑에 가까이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랑이라 써놓고 죽음이라 읽어야 한다면 얼마쯤의 사람이 사랑을 입에 담을까?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다. 대가 그것도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에 사람의 죄의 삯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서 죽어주신 것이다. 

고전13:1에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말로만 하는 사랑도 포함이 될 것이다. 사랑의 본질을 행할 때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의미가 더해진다. 그것이 곧 사랑의 힘일 것이다.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돈은 없어서가 아닌 과도한 욕심이 탈이다. 일용할 양식이 아닌 쌓아두기 위한 욕심이 결국은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는 진실을 넘어 진리이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한다. 

성도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부족한 게 문제다. 사랑에 대한 오해와 이기적인 해석이 성도에게서 사랑을 고갈시킨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사랑의 대가는 희생(죽음)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예수님이 죽음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본질을 따를 수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을 비우고 그 자리에 희생을 택한 사랑을 채우는 삶이 인생이고 그것이 곧 세상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런 세상에 대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것이다. 

hanmackim@hanmail.net    

03.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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