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맨해튼의 타임스 스퀘어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보이는 모든 것이 화려하다. 특히 세계적인 광고들이 함께 모여 주변 모든 건물을 도배한 듯하다. 워낙 빨리 바뀌는 수십 개의 광고라 눈은 즐거울지 몰라도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담기는 어렵다. 광고는 아니지만 교회 건물에 붙어 있던 글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 사역할 때 대전의 어느 교회 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걱정은 그 사람의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걱정하는 자신의 신체 전반에 안 좋게 나타나고, 주변 관계도 부실하게 만든다. 걱정의 뚜렷한 대안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오래 전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었고 두 아들은 보스턴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아들들과 한 동안 연락이 안 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경황(景況)이 없어 전화를 못하였는데 아들들도 바빠 연락이 없는 줄 알았다.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그동안 놀라운 일이 있었다. 아들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두 아들이 탄차가 빙판 길에 미끄러지면서 빙글빙글 돌다가 길옆의 전신주에 부딪힌 것이었다. 아들들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다음날 병원에서 나왔고 그 후 몸도 추스르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나서 우리에게 전화하였다. 우리가 놀랄까봐 한 동안 시간을 보내기도 한 셈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위험한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보스턴에 그 날 그 눈이 올 때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막 시작된 사순절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의 사고와 부모의 기도가 연관이 없었을까. 분명했다. 확신했다. 연관이 있었다고. 우리는 아들들을 언제나 가까이서 지켜볼 수 없었다. 아무리 가까이 있었다 한들 그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이지만 부모로서 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부모의 한계 밖에 있는 자녀들. 그러나 한계 밖의 자녀들을 위해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기도였다.
걱정을 면밀히 연구조사한 통계가 있었다. 아마 어느 기관에서 조사하든 비슷할 것이다.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와서 걱정한다고 결코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0%는 “내가 이런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에 관한 걱정거리라고 한다. 실제로는 걸리지 않을 확률이 더 큰데도 말이다. 그리고 정말 사소한 걱정거리가 12%, 바꿀 수 있는 걱정이 4%, 바꿀 수 없는 걱정이 4% 라고 하였다. 불필요한 걱정 96%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평안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그랬다. 공연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끙끙거리다가 어느 예배에 참석하여 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그날 예배 때 작별했다. 근심 그리고 걱정과.
그 사고 후에 작은 아들에게 물었다.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단 하나의 요청이 있었다. “아빠 엄마의 기도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기도이다. 2024년도 사순절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나지막이 그러나 확신 있게 불러본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 보세요——”
02.2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