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고등학교 때 가장 궁금한 장소가 있었다면 다방이다. 이미 TV에서 다방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렇게 대단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방을 어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곳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만남이었다. 커피나 음악 등은 만남을 위한 아름다운 장치였을 뿐이다. 지금은 곳곳에 카페가 넘친다. 그곳의 음악과 인테리어도 필요하고 커피 맛도 중요하다. 홀로 카페에 앉아 커피 맛을 음미하거나 공부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의 다방인 카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만남이다. 사실 다방이나 카페가 아니라도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 나는 이미 중학교 때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길이다. 음악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던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에서라도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갈망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 꿈속에서가 아닌 실제 만남이 있었다. 필자가 속한 교단 총회가 대면으로 있었다. 3년 만이었다. 전체 예배와 회의가 전개되면서 틈틈이 개인적인 반가움을 표했고 식사와 교제의 시간에는 삼삼오오 각자 겪었던 아픔과 누렸던 축복,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사모님들도 함께했기에 여기저기서 밝은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던 짐들이 만남 속에 덜어졌고 개인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아이디어도 만남 속에 용솟음쳤다. 믿음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탁했던 영혼을 맑게 해 주었으며 긍정적인 사람과의 만남은 부정적인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만남의 위력을 계속 체험하면서 필자는 나를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궁금했다. 아무튼 총회 중에 흔히 있을 법한 갈등도 전혀 없었고 다툴 이슈가 하나도 없었다. 오직 만남의 목마름에 흡족한 해갈을 가지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지난주일 오후 교회 식당에서 아내와 식사하고 있는데 옆에 식사를 마친 한 청소년이 계속 앉아 있어서 물어보았다. “요즘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니?” 그 학생이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한 것은 “공부가 힘들어요.” “외모가 신경 쓰여요” 등이 아니었다. “외로움이요” 그러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었다. 다소 뜻밖의 대답이요 눈물이었다. 약간 당황한 나는 매우 전형적인 말을 덧붙였다. “왜? 친구도 많을 텐데. 가족도 있고.” 그 학생은 더 놀라운 말을 하였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그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뺨에서 흐르는 눈물은 목마름의 눈물이다. 하나님과 만남을 목말라하는 청소년, 그전까지 그의 상태는 외로움인 것이다.
하나님과 만남을 목말라하는 것이 보기에 애처롭기는 하지만 비참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애처로움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우리는 만남을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한다. 팬데믹은 만남이 일상의 일부가 아니라 축복임을 일깨워주었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도 축복이며 하나님과 만남은 더더욱 그렇다. 만남을 목말라하는가?
05.2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