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예수장로회 총회장, 뉴욕센트럴교회 담임
지난 2월18일 주일 늦은 밤에 서울에서 카톡이 들어왔다. “목사님! 김명혁 목사님께서 말씀 전하러 가시는 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 달려가신 길은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하셨지만 남은 우리들은 안타깝고 슬픈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춘천의 어느 교회에 주일 설교하러 가시던 중에 자동차 사고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의 나라로 가셨다.
고인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 삼성 장례원에 도착하니 이틀째 일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인께서는 강변교회를 설립, 목회하시고 원로목사로, 합동신학교 교장을 역임, 명예교수로, 합신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셨고, 40년 전에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를 창설하여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노선 구축을 이룬 훌륭한 연합 사역들을 이끌어 오셨다. 은퇴 후 20년은 전국 방방곡곡 어렵고 가난한 교회들을 자비량 방문하시면서 복음과 함께 온정을 쏟으시며 살아오셨다. 소천하시는 날도 주일 설교차 나섰다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셨다.
김 목사의 생애를 약술한다면, 김관주 목사의 아들로 동경에서 태어났고, 신의주 제2교회에서 고인의 부친은 한경직 목사와 동역을 하셨다. 부친께서 평양 서문밖 교회 담임목회로 재임할 때 공산당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탄광 노동 감옥에 갇히셨고 결국은 순교를 하셨다. 11살이었던 아들은 부친과 의논 끝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로 북한을 탈출하여 서울의 이모 집에서 청소년기를 지냈다. 서울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성봉목사의 집회에 심취하여 은혜를 체험한 후 좋은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고교시절에는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렸던 김치선 목사에게서 “2만 8천개 마을마다 우물을 파라!”는 비전에 힘을 얻어 왕십리에 나가 노방 전도하여 아이들과 어른들 100명이 모이는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울대학에 입학하여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등과 함께 애국운동을 벌렸고 평생을 복음의 동지로 지내왔다. 미국에서 훼이스, 웨스트민스터, 예일대학,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학위를 얻고 총신대 신학원의 교회사 교수로 재임 중에 박윤선, 신복윤, 박형용 윤영탁과 함께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셨다.
필자는 총신 신학원의 학생과 스승으로 처음 만났지만, 영안교회와 강변교회를 함께 개척하면서 가까이 섬길 수 있게 된지가 46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승이 남겨주신 신앙적인 인품과 가르침만이 남았고, 다정하신 모습은 더 이상 뵈올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몸은 떠나셨지만 스승이 남기시고 간 발자취가 너무 선명하고 굵기에 결코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일사각오의 신앙 –고인은 어린 나이에 월남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을 담대하게 사셨다.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셨다. 총신 교수 시절에 정보부에 잡혀가셨다. 주일에 대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은 신앙 침해라는 대정부 항의의 글을 게재한 것이 요인이었다. 물리적인 수사는 없었지만 강도 높은 문책 이틀 후에 석방되었다. 그는 잡아올 때처럼 갈 때에도 집에 데려다 줘야 하지 않는가? 해서 검은 지프차를 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아프카니스탄에 선교 갔는데 어느 선교부에서 현지 학생들의 책걸상을 준비해서 싣고 왔지만 탈레반들이 통과를 허가하지 않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에… 목사님은 홀로 철조망을 넘어가다가 체포되었다. 담대하게 너희 자녀들을 돕겠다고 먼 나라에서 왔는데 이렇게 가로막는 것이 합당한가? 대장을 불러오라고 호통을 치고 결국은 설득해서 그들의 호송을 받으며 선물을 전달하도록 했다고 한다.
철저한 주일성수 – 강변교회 시절에 교인들이 그룹으로 유럽관광을 갔다 왔다. 문제는 주일에 귀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 문제였다. 주일날 예배도 빼먹고 비행하는 것에 대한 따끔한 지적으로 3개월 동안 성가대, 교사, 집사직의 직무정직 근신 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 후에 교회가 주일성수를 더욱 힘썼는데 그 때 배운 어린 학생들이 이번 장례식에 가보니 장로들로 세움을 받고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했다.
복음 증거를 위한 삶 – 유럽을 거쳐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 암스테르담 공항에 탑승수속 중에 가방을 도난당했다. 패스포트와 미국 비자도 함께 사라졌다. 한국 영사관의 임시 패스포트는 받고 미국 비자를 얻기 위해서 영사관에 갔다. 그날이 토요일이라서 문이 닫혔고 경비원만 있었다고 한다. 경비원은 월요일에 오라고 했지만 김 목사님은 ‘나는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다. 영사에게 당장 연락을 하라’고 강조하는 바람에 연락을 받은 영사가 달려왔다고 한다. 영사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나는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복음 전하는 목사’라고 대답을 했더니 시편 100편을 암송해 보라고 시험을 했는데 평소에 암송하는 말씀이라 쉽게 암송을 했더니 영사는 ‘틀렸다’ 그것은 23편 말씀이지 100편이 아니라고 우겼다. 그때에 목사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영어로 줄줄 암송하면서 이것이 23편이라고 주장하자 확인해 보자고 해서… 보여줬더니 영사가 틀렸고 김 목사님 맞는 바람에 영사는 그 자리에서 비자를 찍어 보냈다고 한다.
존경하는 목사님! 후학들에게 남기고 가신 신앙의 이정표가 너무 뚜렷해서 길 잃을 염려가 없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순교자 부친의 뒤를 잇고, 최후까지 복음을 증거하시다가 품에 안겼던 박윤선 목사님의 뒤를 따라 목사님께서도 주일 아침 복음 증거를 위해 달려가시다가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바쳤던 사도 바울의 뒤를 따라 가심에 언젠가는 남겨진 사람들도 스승들의 뒤를 따라 안식의 나라에서 뵈올 때까지 존경을 고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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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