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예수장로회 총회장, 뉴욕센트럴교회 담임
세계가 온통 다 갇혀버렸다. 하늘도 닫히고 땅도, 바다도 닫혔다. 선진국, 후진국 가리지 않고 다 닫혔다. 나라와 나라들도 닫혔고 도시와 도시들도 닫혔다. 직장도 닫히고 학교도 모든 비즈니스도와 시설, 기관들도 몽땅 닫혀버렸다. 2천년 역사에도 닫힌 적이 없었던 교회마저도 닫혀버렸다. 하늘의 비행기들도, 하이웨이의 자동차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핸들을 잡고 달리는데 딱히 갈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사랑하는 이웃들이 별세를 했는데도 장례식은커녕 문상도 못하도록 닫아버렸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온종일 가족들만이 한 가정 안에서 갇혀 지낸다. 한 가족이라도 양성과 음성은 윗층, 아랫층으로, 이 방과 저 방으로 각각 격리하여 갇혀 있다.
모든 사회, 활동이 완전 스탑되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정서와 인내마저도 더 이상 갇힐 수 없다고 거리로 튀어나와 데모를 하는 도시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우리 세대에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에 갇힘을 겪고 있다. 일상의 삶이 갇힐 때 그래도 모두가 당하는 일이라서 조금은 덜 갑갑하다. 이것이 상대성 심리효과이라고 하던가? 문제는 모두가 당하는 갇힘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 폐결핵으로 2년6개월을 갇혀보았다. 마산 가포리 요양소에서, 그리고 광양만 외딴 시골농가에서 2년을 갇혀 있었다. 가족들로부터도 격리되었고 학교와 친구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소외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갇혀있었다. 동서남북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마음도 영혼도 처절하게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위로 열린 우주세계의 무한대의 공간이 있음을 보았다. 자신의 무능과 불가능을 넘어 인생을 우주를 맘껏 운행하시는 절대자를 보는 순간 그 끝없이 넓고 넓게 펼쳐진 상천하지는 내 품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그 분의 러브레터를 읽고 묵상하면서 좁은 가슴에 우주를 품게 하셨고 갇힘은 또 하나의 열림의 시작인 것을 깨닫고 되었다. 끝없는 자유함을 누리기 시작했다. 잠깐 엎드려 기도했는데 몇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 순간에서 영원의 신비를 맛보기 시작했다. 흑암의 골방에서도 거리를 초월하는 독수리눈의 자유함을 맛보기 시작했다.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신다는 절대자와 동행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갇힘이 이제는 영원한 자유로의 출구임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 분께서 주신 러브레터를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같이 갇힘의 삶의 전과자들이었음을 발견했었다. 아브라함은 허왕된(?) 약속을 붙잡고 25년의 갇힘 속에서 끝내 아들을 품에 안았다. 모세는 자그마치 40년의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 갇혀있었다. 요셉은 20세 어린 나이에 10년을 감옥에 갇혀있었다. 다윗도 일상의 삶으로부터 쫓겨나 광야에서 13년의 갇힘 속에서 지내야 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33년의 인생이라는 육신의 삶속에 갇혀 죽으심으로 자유함을 누리셨다. 바울 사도는 수를 셀 수 없는 투옥의 갇힘 속을 번복하면서 오늘의 우주적인 기독교의 골격을 완성해 내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갇힘에서 자유를 얻었다. 남아공의 멘델라는 27년을, 한국의 국부 이승만은 6년을, 마틴 루터 킹도 수없이 감옥에 갇혔었다. 현재 지구촌은 우환폐렴으로 갇혀있다. 앞으로 최소한 한 달을 더 갇혀야 한다.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갇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갇힘 속에서 ‘가장 높이 오르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붙잡던지… 시력이 약하면 베르디의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을 감상하면서 어떻게 70년의 갇힌 저 포로들이 눈부신 금빛날개를 달고 자유의 창공으로 솟아 나를 수 있었는지 찾아보면 좋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앞으로 한 달이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한 갇힘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jykim47@gmail.com
04.2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