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주용한은 하와이 노동 이민의 비전을 품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1903년 이후 1905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한인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그가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의 이름을 영문으로 Choo Yong Han으로 표기했고, Choo Youg Hon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초기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 명단에서 주용한의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그는 하와이로 이민한 후에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주용한이 알려진 때는 1915년이었다. 그는 마우이섬에서 거주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그해 5월 10일에 하와이 국민 총회 임시의회가 호놀룰루에서 부회장 신홍균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가와도 도민 대표 이종관, 힐로 구역대표 전익주, 하막구아 민회 대표 안영칠 등 지방 대표자 18명이 참석하였는데 주용한은 마우이섬 전도민 회장으로 출석하였다.
그해 주용한은 마우이섬 하나에 거주하면서 하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2년 후에 하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해 하나 한인감리교회는 기파후후 한인감리교회와 함께 순회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조한식 목사가 순회하면서 시무하였다. 1915년 2월에 모인 제10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보고서에서 이 두 순회 구역의 통계를 찾을 수 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10명이었고, 지난 1년간 4명이 학습을 받았으며, 세례 교인은 17명이었는데 이 중 4명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하나 한인감리교회에만 주일학교가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18명이었다. 그리고 500달러 시가의 예배당과 300달러 시가의 사택이 하나 한인감리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3월 8일부터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감독 에드나 라이트 레오나르드 박사의 사회로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3일 동안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고, 한국인 교회 총무는 임찬호 목사였다. 임찬호 목사 외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한인 임원으로 2명이 더 있었다. 일본인 J. 스즈기 목사와 함께 송헌주 목사는 통계부 부총무였고, 그는 또한 한국어 통역관으로도 재직했으며, 김이제 목사는 일본인 목사 J. 모리모도와 함께 재무부 부총무로 재직했다.
그해 13명의 정회원 중 한국인 목사는 2년 차 조연택 목사, 3년 차의 홍한식 목사, 10년 차 홍치범 목사, 김이제 목사, 이선일 목사, 임준호 목사 이상 6명이 있었고, 준회원 7명 중 한국인 목사는 3년 차의 송헌주 목사, 4년 차의 김재성 목사 그리고 과정을 완료한 이관묵 목사와 박세환 목사 이상 4명이 있었다.
정회원과 준회원이었던 한인 목사는 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성경/소책자 위원회에서 김이제 목사와 임춘호 목사가 활동하였고, 연회 관계 위원회에 김이제 목사가 있었으며, 주일학교/엡워스 청년회 위원회에 홍한식 목사가 활동하였고, 공제 관계/해결 위원회에 이선일 목사와 조연택 목사 그리고 송헌주 목사가 있었으며, 해외 선교 위원회에 홍한식 목사가 활동했으며, 절제 위원회에 이선일 목사와 최SE 목사가 있었으며, 주일 성수 위원회에 박세환 목사가 활동했고, 고시 위원회에서 홍한식 목사, 김이제 목사, 이선일 목사 그리고 송헌주 목사가 섬겼고, 추천위원회에 박종수 목사와 박기홍 목사가 활동하였고, 방법/수단 위원회에서 송헌주 목사가 활동하였다.
그런데 홍치범 목사와 김재성 목사는 미국 본토로 공부하기 위하여 떠났고, 이선일 목사는 개인적인 이유로 떠났으며, 송헌주 목사는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 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연수자 7명 중 한국인으로는 2년 차의 한명교, 박종수 그리고 박기홍 이상 3명이 있었다. 그해 한국인 목사와 연수자는 13명이었다. 그해 일본인 목사와 연수자는 한국인 목사와 연수자의 절반으로 정회원 3명, 준회원 2명 그리고 연수자 1명으로 6명이었다.
감리사였던 윌리엄 H. 프라이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인 목회자에게 1917년 한 해 동안 지급한 금액은 7,272달러였다. 이 금액은 일본인 목회자에게 지급한 5,028달러보다 2,000달러 이상이 많았고, 필리핀 목회자에게 지급한 2,672달러보다 4,500달러보다 많았다.
그해 마우이섬에는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필리핀인 순회 구역이 있었다. 한국인 순회 구역은 하나와 스프레클스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고, 일본인 순회 구역은 라히나와 가나파리를 중심한 지역이었으며, 필리핀인 순회 구역은 한국인 순회 구역이 있는 하나와 일본인 순회 구역이 있는 라히나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그달에 최SE가 지난 해에 이어 하나 한인감리교회 순회 목사로 파송되었고, 주용한은 하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주용한이 파송 받은 그달에 학습 교인은 2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23명이었다. 이들 중 지난 한 해 동안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2명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세례 교인 2명은 교적은 본 교회에 두었으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상태였고, 교인 중 2명이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나 한인감리교회에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고, 학생 26명이 등록하였으며, 엡워스 청년회는 없었다. 그리고 500달러 시세의 에배당과 372달러 시세의 사택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연료와 전기 등으로 25달러를 지급하였다.
1917년 11월에 김유순 목사가 한국에서 하와이로 파견되어 오하후섬과 하와이섬에 있는 여러 한인 감리교회를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아 신선한 용기를 얻었고, 특별히 많은 사람이 믿기로 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마우이섬에서는 부흥회가 없었다.
이듬해인 1918년 3월 14일에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작년에 이어 감독이 된 레오나르드 목사의 사회로 17일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작년에 이어 프라이 박사였고, 한국인 교회 총무는 작년에 이어 임찬호 목사였다. 지난해에 로스엔젤레스에서 하와이로 온 방화중 목사가 공석이었던 송헌주 목사의 자리를 채워 일본인 목사 Z.히로다와 함께 재무부 부총무 겸 한국어 통역관으로 활동하였고, 일본인 J. 스즈키 목사와 함께 송헌주 목사가 통계부 부총무로 재직했다.
그해 16명의 정회원 중 한국인 목사는 2년 차 박세환 목사, 3년 차 조연택 목사와 이관묵 목사와 이선일 목사, 4년 차 홍한식 목사, 11년 차 홍치범 목사 그리고 김이제 목사 이상 7명이 있었고, 준회원 4명 중 한국인 목사는 4년 차의 김재성 목사와 송헌주 목사 이상 2명이 있었다. 한국인 정회원 목사와 준회원 목사는 총 9명이었다.
정회원과 준회원이었던 한인 목사는 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성경/소책자 위원회에서 김이제 목사와 방화중 목사가 활동하였고, 연회 관계 위원회에 김이제 목사가 있었으며, 교육 위원회에 이관묵 목사와 송헌주 목사가 활동했고, 고시 위원회에서 홍한식 목사, 김이제 목사, 이승만 박사, 그리고 송헌주 목사가 섬겼고, 해외 선교 위원회에 홍한식 목사가 활동했으며, 공제 관계/해결 위원회에 이승만 박사, 조연택 목사, 송헌주 목사가 있었으며, 추천위원회에 박종수 목사와 박기홍 목사가 활동하였고, 주일 성수 위원회에 박세환 목사가 활동했고, 주일학교/엡워스 청년회 위원회에 홍한식 목사가 활동하였고, 절제 위원회에 이선일 목사가 있었으며, 방법/수단 위원회에서 송헌주 목사가 활동하였다.
연수자 10명 중 한국인으로는 2년 차 안시흡, 3년 차 한명교, 한영준, 박종수 그리고 박기홍 이상 5명이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인 교회를 위하여 얼마간의 재정을 지급하였다. 한국인 거주지 구매를 위하여 700달러를 지급하였고, 리휘에 있는 한국인 학교 교사를 확장하는 데 750달러를 후원하였고,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수리비로 164달러 84센트를 지급하였다.
그해 오아후섬, 가와이섬, 하와이섬 그리고 마우이섬에 한인 감리교회와 한인 순회 구역이 있었다. 오아후섬에는 호놀룰루와 에와와 와일누아 이상 세 지역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고, 가와이섬에는 리휘/길나위아 한인 순회 구역과, 막가웰리/골로아 한인 순회 구역이 있었으며, 하와이섬에는 하갈나우, 호녹가이지, 고할라, 파할라, 파파로아 이상 지역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고, 힐로/가파호 한인 순회구역이 있었다.
그리고 마우이섬에 지난 해와 같이 스프렉켈스빌 한인감리교회와 하나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조용한은 하나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하나 한인 감리교회 목사로 한YC 목사를 파송하였고, 지방 전도사로 최진태를 파송하였다.
1918년 3월에 보고된 통계에서 지난 1년간의 성장을 셈할 수 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작년과 같이 2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작년과 비슷한 20여 명이었다. 이들 중 지난 한 해 동안 1년 전과 같이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나 입교한 자나 학습을 받은 자는 없었고, 이주한 교인과 소천한 교인 통계도 없었다. 한인감리교회에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고, 26명이 등록하였으며, 주일학교와 엡워스 청년회 통계는 지난 해와 같았다. 그리고 지난 해와 같이 500달러 시세의 예배당과 372달러 시세의 사택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연료와 전기 등으로 지급한 금액은 없었고, 작년에 없던 훈련비 항목에 10달러를 지출하였다. 이상의 통계에서 볼 때 교세가 작년과 비슷하게 보인다.
주용한은 1919년 이후 한인 감리교회 교역자로 파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마우이섬 하나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에 주용한은 마우이섬 하나에 거주했다. 그해 4월 19일 신한민보에 보도된 바대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거주하던 유지인사가 대한민족 통일촉성회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그 준비 위원으로 회장에 조용하, 서기에 최창덕을 선정하고, 김영기, 김윤배, 김유실, 김유택, 이상호, 이복기, 이원준, 이태성, 이성신, 유개상, 문또라, 민찬호, 박상하, 박인영, 신국겸, 손덕인, 안현경, 안원규, 양유찬, 정인수, 정운서, 조광원, 조병요, 황혜수, 홍한식, 김경준, 정운명 이상 여러 명을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이에 주용한이 축하문을 보냈다. 그 외에도 호놀룰루의 이승만 박사와 김태석, 학갈라우의 박성환, 마리후의 이만정, 과이야의 홍치범도 축하문을 보냈다. 그 후 주용한의 사적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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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