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붕서는 1867년 2월 9일에 한국 평안남도(?) 중애에서 태어났다. 그는 1876년 9월 17일에 평양에서 태어난 전민리와 결혼하였다. 그의 부인의 이름 민리가 영어로 메리사이므로 이는 세례받을 때 받은 세례명으로 보여 그녀가 기독교이었음이 틀림없다. 결혼 후 그는 풀노리에서 농사하였다고 하는데 강원도 강릉 인근 풀노리로 보인다.
37세가 되던 1904년 9월에 김붕서는 하와이 노동 이민 기선을 타고 29세의 아내와 4살과 1살 된 두 딸과 함께 그달 3일에 출항하여 그달 16일에 하와이 호항에 도착했다. 1920년 인구조사에서 그가 1903년에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기로 보인다. 그는 영어 이름을 Poong Soh Kim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하와이로 이주하여 김봉서로 개명하고 영어이름을 Bong Sur Kim으로 한 것 같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김붕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였다.
하와이로 온 지 10년이 되던 1914년에 김붕서는 하와이섬 파팔로아에서 거주했다. 그해 6월에 하와이섬 파팔로아에 있는 한흥 학교에서 여름 방학 예식이 거행되었다. 어린 학도들의 유쾌한 노래로써 일반 청중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자못 비상한 성황을 이루었다. 그날 새 학년도부터 시무할 임원을 선정하였을 때 김붕서는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교육부장에 서광석, 총무에 오창익, 서기에 김정구 그리고 재무에 박래형이 있었다.
1920년에 김붕서는 하와이섬 힐로의 북쪽 지역인 노스 힐로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했다. 그해 아내와 함께 세 자녀가 함께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두 아들, 1909년에 태어난 존과 1912년에 태어난 베드로 그리고 1917년에 태어난 딸 세라였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할 때 동행한 두 딸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지 그해 인구조사에 없었다.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28년 3월에 김붕서는 다른 두 명의 전도사와 함께 이관묵이 담임목사로 있었던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유아세례교인이 17명,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이 75명, 세례 교인은 66명, 학습교인은 85명이었는데 이중 그해에 학습교인이 된 자가 28명이었다. 그리고 힐로 지역에 교회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9명의 교사와 직원이 수고하였으며 등록한 학생은 118명이었으나 평균 78명이 참석하였다. 이로써 당시 교회 사정을 감안한다면 힐로 교회가 비교적 큰 교회로 보인다.
이듬해 3월 20일에 계삭회가 있었다. 그날 오후 6시에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 푸라이 박사와 선교 총무 콜스테드 박사를 위하여 힐로 교회는 경채류에서 40여 남녀 교인이 모인 가운데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고, 그날 7시 반에 콜스테드 박사가 설교한 후 이어서 성만찬 예식이 있었으며, 그날 8시 반에 계삭회가 있었다. 참석한 사람은 이관묵 목사, 심상헌 전도사, 김붕서 전도사, 변응환 권사, 김창운 권사, 함마구레 주일학교교장 등이었다. 그달에 유아세례 교인이 19명,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이 78명이었으며, 세례교인이 70명이었고, 학습교인은 78명이었고,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은 39명이었다. 작년과 비교할 때 유아세례 교인은 2명이 증가했고,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은 3명이 증가했지만, 세례 교인은 4명이 줄었으며, 학습교인은 7명이 줄었고,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도 11명이나 줄었다.
유사였던 안성태의 재정 보고에 따르면 이월금이 11달러 95센트, 수입금이 343달러 85센트, 지출금이 316달러 1센트여서 잔금이 39달러 90센트였다. 지출 내역으로는 자급 80달러, 전기세 8달러 50센트, 전화세 15달러, 은퇴 목사 보조 13달러, 연회 연조 150달러, 잡비 6달러였다. 그리고 주일학교에 27달러, 청년회에 18달러 20센트를 지출했다.
그해 이관묵이 힐로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되었고, 본 교회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자는 이정두와 심상헌이었는데 김붕서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1930년 2월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 3명의 전도사가 파송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김붕서가 전도사로 파송된 것으로 보인다.
힐로 한인감리교회 헌당식 (1930년)
그해 9월에 시작하는 가을 학기부터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한인 교사가 하와이에 강영각 등 12명이었는데 그중에 부인 김민희가 힐로 소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힐로 한인 사회에 큰 기쁨이었다. 다른 한편 그달에 북고나와 서부 하와이섬 일대에서 화산이 폭발한 결과로 힐로에서 미진이 계속되어 크게 걱정하였다.
1930년 2월에 보고된 바로는 유아세례교인이 14명,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이 90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은 94명이었는데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은 31명이었고, 세례교인은 76명이었다.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는데 교사와 직원이 9명이었고, 둥록한 학생이 131명이었지만 평균 출석은 90명이었다. 그해 주일학교를 위하여 45달러가 지출되었고, 고등부 엡윗 청년회에 27달러를 지출했지만, 중등부 엡윗 청년회에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14달러가 지출되었다.
1930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전도사 파송 명단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어도 김붕서가 다른 2명과 함께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해 이관묵 목사는 하와이섬 한인 사역을 목적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파파할나, 호녹가이지, 힐로 그리고 코나에 있던 네 한인감리교회를 담당하였으므로 네 교회를 한 달에 한 번 순회 방문한다고 치면 전도사에게 개 교회를 섬기는 사역의 무게가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내지 선교 및 교회 확장 위원회의 위원장인 케논 G. 라모스 목사가 1931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바로는 1930년의 하와이 선교연회 이후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자체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부채가 없었으므로 헌당식을 할 수 있었으며, 토지 구매와 예배당 건축에 12,000달러가 소요되었다. 신한민보도 ‘힐로 미감리교 예배당 낙성’이라는 기사를 쓰고 그해 5월 25일에 이관묵 목사의 주례하에 아름다운 순서로 낙성식을 거행했다고 보도했다. 그해에 헌당식을 한 교회가 하나 더 있었는데 한국인 교회는 아니었지만, 오아후섬에 있는 가이루아 커뮤니티 교회도 있었다. 그해에 하와이 선교연회 지역에서 예배당 건축을 하고 있던 교회가 세 교회가 있었다. 하와이섬의 나아레후 감리교회, 같은 섬 호노가 감리교회 그리고 오아후섬의 와히아와 감리교회로 세 교회였는데 그해에 건축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가 건축헌금을 거의 마련한 상태여서 곧 예배당을 건축할 예정이라는 기쁜 소식도 있었다. 가하루 일본인 교회는 주일 학교 예배실이 필요했고, 호항 한인감리교회는 커뮤니티 하우스 프로그램을 하기 위하여 주택을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힐로 한인감리교회가 예배당과 부속 건축 후에 입당식이 아니라 헌당식을 한다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바로는 그해 유아세례를 받은 교인이 15명이었고, 학습을 받은 교인이 29명이었으며, 그해 학습 교인은 95명, 세례 교인은 55명이었다.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는데 교사와 직원을 합하여 7명이 있었고, 120명이 등록을 하였는데 평균 85명이 참석하였다. 주일학교에 45달러를 지원했고, 고등부 엡윗 청년회는 24달러를 지원했으며, 중등부 엡윗 청년회에 고등부 엡윗 청년부의 1/3에 해당하는 7달러를 지원했다.
1931년에도 김붕서는 심상헌과 김묘연과 김CW 그리고 이EM과 함께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해에는 예배당을 헌당하여서인지 예년과 달리 5명의 전도사가 힐로 교회에 파송이 되었다. 그런데 1년 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3명의 전도사가 파송된 것으로 나온다. 이관묵 목사는 작년과 같이 파파할나, 호녹가이지, 힐로 그리고 코나에 있던 네 한인감리교회를 담당하였으므로 네 교회를 한 달에 한 번 순회 방문한다고 치면 한 달에 세 주일은 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해야 하고, 그 외 목회도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1932년 2월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게재된 보고에는 유아세례교인과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만 소개되고 있다. 그 보고에 따르면 유아세례교인이 22명,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이 32명이었다. 그달에 백인 교회 1, 필리핀 교회 12개, 일본인 교회 14개, 한인 교회 12개가 있어 총 39개 교회에 유아세례 교인이 총 396명이었으므로 힐로 교회 유아세례교인은 6%에 해당했고,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이 697명이었으므로 힐로 교회 학습 받은 교인은 5%에 해당했다. 1932년에도 김붕서는 다른 2명의 전도사와 함께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1933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통계가 없어 교회 형편을 알 수 없다.
1933년 3월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는 이관묵 목사를 예년과 같이 하와이섬에 거주하던 한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심상헌 전도사와 김묘연 전도사와 함께 김붕서도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5월 7일에 감리사 프라이 박사가 힐로에 도착하여 저녁 7시 반에 설교하고 이어서 계삭회를 열었다. 참석한 직원은 김붕서 전도사를 비롯하여 이관묵 목사, 심상헌 전도사, 김묘연 전도사, 김창운 권사, 김순복 주일학교 교장대리, 김세라 청년회장, 피흥선 유사, 이정근 유사, 전익서 탁사, 고성화 탁사, 김원섭 탁사, 오영식 탁사, 안선도 속장, 김베르도 속장이 참석했다. 유사의 보고에 따르면 수입금이 308달러 77센트, 지출금이 301달러 71센트, 잔금이 7달러 6센트였다. 1934년 하와이 연회에 보고된 바 힐로 한인감리교회에서 지난 한 해 동안 7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학습 교인은 71명이었으며,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은 20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70명이었다.
1934년 하와이 연회는 예년과 같이 이관묵 목사를 하와이섬의 네 곳에 거주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사로 파송했고, 김붕서도 다른 2명과 함께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관묵 목사가 15차로 파송을 받았으므로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그해 2월 25일 주일 아침 예배를 제15차 파송 환영회로 모였다. 교회와 부인회가 주최하였고, 김붕서 전도사가 사회를 본 가운데 이 목사 내외에게 화환을 걸어 환영하였고, 김 전도사는 환영사를 담당하였으며, 이 목사는 감사하다는 답사로 김 전도사의 환영사에 응했다.
1935년 하와이 연회는 이관묵 목사를 하와이섬 한인을 상대로 하는 선교사로 파송을 하였는데 예배드리는 지역이 여섯 곳이나 되었다. 그해 3명의 전도사가 파송을 받았으므로 김붕서가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것으로 본다.
이승만이 그해 3월에 호항선교기념관에서 300여명 청년이 동지회 주최로 모여 이동빈의 사회하에 특별강연회가 있었다. 그해 11월 2일에 김붕서의 장자 요한 군과 호항 최두욱 씨의 장녀 메리온 양과의 결혼식이 호항 한인감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본 교회 담임목사인 임두화의 주례로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들의 결혼은 양가와 힐로 한인 교회에 큰 기쁨이 되었다.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국어학교가 있었다. 감리사 프라이 박사는 국어 교육을 인정했으나 소극적이었다. 교실과 교사 월급은 교회가 일정량 담당하였고, 교사의 자격을 갖춘 선생은 거의 없어 열악했다. 힐로에서는 다행히 이관묵 목사가 국어학교에서 가르쳐 교사질로서는 최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교수 방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김붕서 전도사를 비롯하여 황인환, 이병운, 백만금 등이었다.
김붕서는 1954년 8월 18일에 향년 8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남편의 성을 딴그의 아내 김메리사는 이듬해 12월 18일에 향년 79세로 남편을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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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