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의조는 1901년 10월 5일에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베리아’ 기선을 타고 하와이 노동 이민을 떠난 27세의 아버지 정호영과 21세의 어머니와 누나 문이와 함께 세 살 때인 1904년 5월 20일에 하와이 호항에 도착했다. 그는 호항 인근의 에와 농장에서 성장했다. 1906년에 정의조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2세에 가정을 떠나 호항에 있던 한인기숙학교와 아이오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7년에 오레곤 대학교를 나와 2년 뒤에 노스 다코타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의조는 1930년에 박헤이즐과 결혼했다. 아내는 1남 6녀 중 밑에서 세 번째였다. 유치원 다닐 나이에 ‘한국부인과 여아 기숙관’에서 영어와 바느질과 가사를 배웠다. 이 ‘한국부인과 여아기숙관’은 미국 남감리교 재단이 이민자 자녀를 돌보는 돌봄 학교이면서 보육원이기도 하였는데 영어로는 수잔나 웨슬리 홈이라고 불렸다.
박헤이즐과 결혼한 다음 해인 1931년에 김유택 의사의 가정에서 호항의 유지들이 모여 청년운동이 필요한 줄로 인증하고 임시 임원을 선택하였다. 회장 이용직 목사, 서기 강영각, 재무 한길수, 사교원 김유택을 선정하였고, 정의조는 이싸라잉, 김이벨잉, 이동빈, 조광원, 홍한식, 이한식, 박종수와 함께 이사원으로 선임되었다.
YMCA
하와이 선교연회 윌리엄 프라이 감리사의 권유로 신학교를 나와 정의조는 1932년에 미국 남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산하 하와이 선교연회에 소속되었다.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를 호항 YMCA로 파송하였고, 소년 사역에 집중했다.
이듬해 6월 2일 하오 6시 반에 누아누 청년회관 내에서 정의조 전도사의 사회로 신사 숙녀 합하여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 학생 졸업 축하 만찬회가 있었다. 이용직 목사가 기도한 후 감리사 푸라이 박사가 축하사를 전했으며, 대학 졸업생 여러 명이 답사하고 감상담을 나누었다. 졸업생에게 영광됨은 물론 호항 한인감리교회에 영광이 되었음은 대학교 졸업생 6명 전부와 중학교 졸업생 중 10명과 예비 중학생 졸업생은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본 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정의조는 YMCA 사역 이외에도 하와이섬의 하갈나우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고, 힐로 고등학교에서 산업 과목을 가르쳤다. 1936년까지 하와이 선교연회의 파송으로 정의조는 YMCA와 연계하여 한인감리교회에서도 사역하였다.
호항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34년 1월에 푸라이 감리사의 사회로 계삭회를 열었다. 임두화 목사가 교회 기관의 발전 상황을 보고하였고, 그해 시무할 직원을 선정하였다. 본처 목사에 박종수와 김이제가 파송되었고, 정의조는 송치순, 문또라, 안정송과 함께 전도사로 파송되었으며, 정원명, 안원규, 문또라, 편성원과 함께 탁사로 파송되었고, 조제언, 박종수, 송정윤, 권도인, 안원규, 문또라, 황사근, 홍숙자, 남마태와 더불어 유사로 파송되었으며, 주일학교장으로도 파송되었다. 그 외 권사로 이승무, 황혜수, 박명준, 임정렬, 속장에 김신경, 송정윤, 이헬렌, 홍숙자, 김신일, 박에스더, 이정선, 권희경, 유진학, 엡윗 청년회장에 고복성, 부인보조회장에 임정렬이 임명되었다.
1934년 11월에 호항 한인감리교회 주일학교 전체가 사교실에 모여 희락회를 열었다. 주일학교장 정의조가 사회를 맡았고, 간단한 개회식 이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유희로 즐기고 다과를 나누었다.
그해 12월에 감리사 푸라이 박사 내외가 미리 설비한 누아누 청년회관 만찬석에 호항 한인감리교회 일반 직원을 청하여 식사를 한 후 본 교회 1934년 마지막 계삭회가 있었다. 프라이 감리사의 사회로 개회하고, 정의조가 서기로 선정되었다. 직원 보고가 있은 후 1935년도 직원을 선택하였을 때 정의조는 가주 연회 학습원으로서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고, 유사와 탁사 그리고 주일학교장으로 임명됐다. 그날 파송과 임명을 받은 사람으로는 목사에 박종수, 전도사에 정의조 외에 송치순, 황혜수, 안정송, 임정렬, 문또라 등이 있었다. 송구영신예배가 그달 31일에 있었는데 저녁에 많은 교인이 모여 간단하게 기도회를 한 후 대화와 유희 등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다가 밤 12시 자정에 신년을 맞이하였다.
1935년 1월 한 달은 바빴다. 첫 주일을 가정 주일로 지켰고, 세상 풍파를 떨쳐버리고 나아온 교우들의 가정이 많음으로 과거 몇 해 동안에 처음 수백 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그날에 새로 등록한 가정이 21가정이었다. 그달 19일에 신년 만찬회를 사교실에서 가졌다. 120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유사부에서 편성한 예산대로 거진 확충되었고, 부족한 것은 추후 활동하여 보충하기로 하였다. 상을 치우고 일반 남녀노소가 기쁨을 주고받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본 예배당과 국어학교실과 사교실 등을 1,000달러 예산으로 수리할 터였는데 벌써 공역에 착수하여 2월 선교연회 이전으로 완전히 끝내기로 하였다. 둘째 주일 오후에 부인보조회 정기회로 모여 1년간 시무할 회장 안정송, 부회장 이금우 등을 선정하였다. 그달 27일 주일 오후에 엡윗 청년회가 하나우마 해변에 나가 교제한 후 회장 박관선, 부회장 남마태 등을 뽑았다.
그해 2월에 교회 건물 수리를 마쳤다. 예배당은 안벽에 풀내스트봇을 부치고 칠을 하였고, 전등을 달았으며, 바깥은 두 번 칠하고 모래를 뿌리고 지붕을 고치고 검은 칠을 하였다. 국어학교는 앞으로 유리창을 더 늘이고 안과 밖을 두 번 칠을 하였고, 사교실도 마루와 벽을 칠하였고, 접는 의자 70개를 감리사 푸라이 박사가 사서 보냈다. 이렇게 건축 기관들을 일신하게 수리하여 신건축이나 다름없는데 공역비가 1,000달러에 달하여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담당하고, 본 교회에서는 100달러가량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해 3월에 하와이 연회가 호항에서 있었다. 6일 오후 4시 30분에 호항 한인감리교회 부인회가 감독과 연회원을 환영하기 위하여 사교실에서 간단한 순서와 다과를 준비했다. 이동빈 목사의 딸 옥인의 삼중 독창은 회중의 흥기가 도도하였다. 8일 오전 8시 30분에 감독이 기도회를 주장하였고, 목사들의 보고가 있은 후 미국 종군 목사의 연회 환영사가 있었다. 12시에는 기념사진을 찍었고, 식당에 들어가 교회 부인회에서 준비한 오찬을 나누었다. 오후 2시에 각 위원회가 모였고, 저녁 6시 30분에는 여자 청년회관에서 설비한 연회 만찬회가 있었는데 300여 명이 모여 식사하였고, 식사 후에 재미있는 순서가 있었다. 9일 오전 8시 30분에 감독이 기도회를 주장하였다. 하와이 절금회장 한 목사의 절금에 관한 설명이 있었으며, 그 후에 연회관계, 과정 시험, 주일학교와 청년회, 안식일 등 각 위원의 보고가 있었다. 저녁 7시 30분에 와히아와 교회에서 감독일행을 환영하였는데 총무 콜스태 박사가 설교하였다. 10일 주일 아침 11시에 호항 백인 제일예배당에서 호항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연회 예배를 드렸다. 감독 베커 박사가 설교하였고, 저녁에도 역시 같은 예배당에 연합예배로 모여 콜스테 박사가 설교하였으며, 호항 한인 감리교회 찬양대 40여 남녀가 찬양하였으며, 예배를 드린 후 정의조에게 집사 목사로 안수하였고, 그는 준회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20일 수요일 하오 6시에 감리사 프라이 박사 내외의 초대로 계삭회 회원이 모여 만찬이 있은 후 계삭회를 열었다. 중요 직원의 재미로운 보고가 있은 후 명년도 직원을 선정하였다. 정의조는 탁사로 선정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전도사에 송치순, 황혜수, 안시택, 권사에 이승무, 송정윤, 탁사에 이정근, 편성운, 안원규, 정원명, 유사에 박종수(회계), 조제은, 안원규, 이정두, 남마태, 황사근, 권도인(부장), 장형신, 심영신, 최혜림, 주일학교장에 남마태, 웹윗 청년회장에 고복성, 부인보조회장에 심영신이 있었다.
힐로 한인감리교회 목사
1937년 2월에 장로 목사가 되어 정회원이 된 정의조는 하와이섬의 힐로 구역으로 파송을 받아 힐로 한인감리교회와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힐로 교회에서는 17년을 같이 지냈던 이관묵 목사는 섭섭하게 전별하게 되었고, 새로 임명된 정의조는 환영하게 되어 그해 3월 7일 주일 예배 후에 전도사 전익서의 사회로 전별회와 환영회를 한꺼번에 열었다. 전별 환영회 후 신신루청찬관에서 피흥선의 인도로 90명 교우가 오찬을 나누었다.
정의조는 위의 교회에서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한국어로 설교했다. 그런데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제국이 진주만을 폭격하므로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타지방에서 온 군인과 군속과 다른 영어권 감리교인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자 영어로 설교하면서 한국어로 설교를 요약했다. 그는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이른바 이중 언어 목회자로서 마지막 목사였다.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정의조는 장어 프로그램에 관여했고, 화산 지역에 설치된 킬라웨아 군인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한국인 포로 군종 목사로 활동하였다. 1944년 1월 첫 주일을 가정 주일로 지키면서 30여 명의 해군과 육군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린 후 기념사진을 찍었고, 부인들이 준비한 한국 음식으로 점심을 나누었다. 정의조는 그달부터 입교 공부반을 조직하여 ‘내 교회’라는 책자로 공부하였는데 부활주일에 입교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정의조 목사 내외가 결혼한 지 14년이 되던 그해 2월 14일에 교회에서 결혼 14주년 기념 파티를 열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후 12일 주일 아침에 호항 한인감리교회에서 정의조 목사가 ‘행복을 구함’이란 제목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설교하였다. 한인들에게 적당한 말씀을 하였으므로 일반 교인이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달에 베커 감독과 푸라이 감리사와 종군 목사 쿡이 정의조가 목회하는 힐로를 심방했다. 본처 종군 목사 실버맨과 협력하여 난일노 여관에서 환영 만찬회를 한 후 감독의 인도하에 비공식 토론회가 있었다.
정의조는 1945년 7월에 힐로 지역을 떠났으므로 8년간 위의 교회를 섬겼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인 1937년 2월에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학습교인이 76명었고, 세례교인이 58명이었고,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학습교인이 36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14명이었는데 그가 그만두기 1년 전인 1944년 2월에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학습교인은 보고가 없었고, 세례교인이 24명이었고,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정의조는 1945년 7월에 호항 제일한인감리교회로 파송받아 7년간 목회하였고, 1952년에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아 5년간 섬겼다. 1958년에 그는 호항에서 굳윌 인더스트리즈를 조직하고 최초 행정 디렉터로서 1967년까지 재직했고, 그 해 오아후섬 가하루 연합감리교회에 파송을 받아 2년간 사역하였다. 1968년에 그는 호항에서 ‘민주주의 소리 상’을 받았고, 호항 노인 위원회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의조는 1969년에 은퇴하면서 상항으로 이동하여 상항 굳윌 인더스트리즈에서 직업 상담인으로 활동했으며, 1971년에 상항 인근 오크랜드에 있는 같은 기관의 인사 디렉터로 섬겼다. 1977년에 호항으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978년 7월 3일에 7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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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