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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김봉기 (1875-)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봉기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상주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29세가 되던 1904년 1월 23일에 갤릭을 타고 하와이 노동 이민자로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그는 오아후 섬의 에와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노동했다. 그는 1904년 7월 31일에 백인 목사 조지 L. 피어슨에게서 학습을 받고, 에와 한인 감리교회 학습 교인이 되었다. 피어슨 목사는 1903년에 안정수와 우병일과 함께 호놀룰루에 한인 복음회를 창설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의 감리사였다. 김봉기가 세례를 받던 1904년에 에와 한인 감리교회에 등록한 교인은 56명이었다. 1905년에 에와 한인감리교회에 등록한 한인은 135명이었으나 예배에 참석한 한인은 200명이었으므로 당시 12개 처의 한인 감리교회 중 가장 큰 교세를 지녔다. 당시 하와이에서 감리교회에 등록한 한인수는 451명이었고, 평균적으로 예배에 출석한 수는 605명이었다.

1906년 5월에 하와이 에와 한인 친목회에서 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환란을 맞은 한인 동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금화 27달러와 위로하는 긴 글을 보냈다. 이 사실을 접한 김봉기는 김홍렵과 함께 위의 에와 한인 친목회의 회원이 아님에도 샌프란시스코 구제를 위하여 각각 1달러씩을 에와 한인 친목회로 보냈다. 공립신보는 에와 한인 친목회 회원뿐만 아니라 김봉기와 김흥렵의 동족을 사랑하는 열성을 치하면서 그 긴 글은 다음 호에 기재하겠다고 알렸다. 아래는 에와 친목회장 정원명과 서기 박윤조가 쓴 그 긴 글이다. “경계자는 4월 18일 상항에서 큰 지진과 화재에 생명과 재산이 허다히 손해된 것은 이미 신문상에 게재해 광포되었음에 전달치 않거니와 이것은 환란 중에 미국 사람들의 구제함은 다시 말할 바 없으되 상항에 우거한 각국 사람으로 말하면 다 그 나라 공사와 영사가 ... 구조할 뿐더러 청국과 일본 정부가 거액의 재정을 보내어 환란에 든 자기 백성을 열심히 구제하여... 가공하다. 우리 동포들이야 누가 구조하며 누가 위로하리오. 공립협회에서 천신만고로 열심과 열성을 다하여 비둘기가 깃을 모우는 듯하며, 베짱이가 베를 짜듯 하여 공립회관을 상항에 설립하니 다만 한인의 집은 이 집뿐이라. 본국과 하와이로서 건너가는 동포들을 편리하도록 인도하며 학업과 뇌동에 뜻을 따라 주선하신다는 말을 듣고 우리나라에 독립을 회복할 기조가 확실히 귀 회에 있다고 하였더니 불행히 일조에 남는 것이 없이 다소 화가 되었다하니 한인사회에 큰 건분이라. 우리가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단식하기를 마지아니하노라 하다. 그러나 귀 회에서 이같이 폐를 보고 위급한 중에 더욱이 열심히 하여 연보를 모집하여 위급한 자를 구제하며, 신문을 계속 출간하며, 교무를 폐지 아니하시니 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보건데 어찌 아니하여 공립회관이 다시 될 터이오. 나라를 회복할 열성이 배나 더 생길 줄을 믿나이다. 본 회는 태평양을 준차 있으므로 즉시 가서 위문하지 못하고, 다만 편지로 위문하오니 죄송하외다. 본 회에서 동족상보할 마음은 간절하오나 재정이 넉넉지 못하므로 연금 27원을 수합하여 보내오며, 또한 이곳에 거류하는 김봉기와 김흥렵 양 씨는 회원이 아니나 본 회에 방청하다가 각각 일원씩을 출연하시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함께 보내오니 많은 것으로 아시고 보용하시기를 바라노라 하였더라.‘

김봉기는 1908년 1월에 처음으로 하와이에 거류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전도 사업을 위하여 파송을 받았다. 그해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제3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그는 박화T와 함께 하와이 섬의 올나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이 교회와 힐로 한인 감리교회에 최진태가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았고, 전도사는 파송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진태 목사가 없을 때는 김봉기가 올나 한인 감리교회를 목회하였다.

김봉기가 파송을 받을 때의 올나 한인 감리교회의 교세는 그해 1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교회 현황 보고에서 볼 수 있다. 학습 교인이 42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24명이었으며, 유아 세례교인이 2명이었고, 그해 세례를 받은 성인이 27명이었다.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14명이었으며, 학생은 130명이었는데 평균 90명이 출석했다. 예배당이 하나 있었는데 시가가 250달러였다. 지난 한 해 동안 해외선교를 위해 1달러를 헌금했고, 내지 선교를 위하여 5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어린이 학생 보조금으로 1달러를 헌금하였고, 지역 교육을 위하여 1달러를 헌금하였으며 미국 성서 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였고, 부인 내지 선교회에 2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제네럴 콘퍼런스 비용으로 1달러를 헌금하였다. 교육을 위하여 총 7달러를 헌금했다.

1909년 3월 3일부터 7일까지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제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있었다. 이때 보고한 교회 교세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김봉기의 사역이 1년 전에 비교해 대체로 저조했다. 학습 교인이 6명이 줄어 36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13명이 줄어 11명이었으나, 유아세례교인은 지난 해와 같이 2명이었다. 그해 세례를 받은 성인이 11명으로 지난 해 보다 16명이 줄었다. 주일학교는 지난 해와 같이 두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11명으로 3명이 줄었으며, 학생은 40명으로 무려 90명이 줄었는데 평균 35명이 출석했다. 예배당이 하나 있었는데 지난 해와 같이 250달러에 해당했다. 1년 전과 같이 해외선교를 위해 1달러를 헌금했고, 내지 선교는 지난해 보다 1달러가 많은 6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지난해에 하지 않았던 주일학교 선교비로 3달러를 헌금하였다. 교육을 위하여 지난해와 같이 어린이 학생 보조금과 지역 교육을 위한 헌금을 하지 않았으나, 교회에 2달러 그리고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를 헌금하였다. 미국 성서 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였고, 부인 내지 선교회에 2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제네럴 콘퍼런스 비용은 하지 않았다. 교육을 위하여 총 16달러를 헌금했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하와이섬에 몇 한인교회가 설립되었음은 하와이 선교연회로서는 큰 성과였다. 하갈나우, 코나, 파할나, 파파할나에 한인 감리교회가 설립되어 하와이 섬에 8곳에 한인 감리교회가 들어섰다.

1909년 3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봉기는 정인S와 함께 가와이 섬의 막가웰리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김이제가 막가웰리 한인 감리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는데 긱가하 한인 감리교회도 맡았다. 그러므로 그가 막가웰리로 오지 못할 때는 김봉기가 정인S와 함께 한인 감리교회를 섬겼다.

김봉기가 1909년 3월에 막가웰리 한인 감리교회로 파송되었을 때 본 교회의 교세는 비교적 큰 편이었다. 학습 교인이 119명, 세례 교인이 86명, 유아 세례교인이 8명, 그해 세례를 받은 성인이 22명이었다. 주일학교는 네 곳에 있었는데 19명의 직원과 교사가 등록한 115명의 학생 중 평균 100명을 가르쳤다. 이 지역에 예배당이 3곳에 있었으며 총 시가가 700달러였다. 선교를 위하여 해외선교 헌금 1달러, 해외 주일학교 헌금 1달러, 내지 선교 헌금 6달러 그리고 내지 주일학교 헌금 4달러를 헌금했다. 교육을 위하여 일반 교육 헌금 1달러와 어린이 기금 3달러를 헌금했다. 주일학교를 위하여 교회에 1달러, 주일학교 헌금으로 2달러를 헌금했다. 그리고 흑인 보조회에 2달러, 미국 성서 공회에 2달러, 부인 내지선교회에 4달러를 헌금했다. 훈련 기금으로 27달러와 다른 기금으로 45달러를 헌금하여 총 72달러를 헌금하였다. 

1910년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에 있는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이해 감독은 에드윈 홀트 휴즈 목사였고, 감리사는 J.W. 와드만 목사였다. 이 연회에서 보고된 막가웰리 한인 감리교회의 교세를 작년과 비교하면 대체로 좋았다. 학습 교인이 50명으로 69명이 줄었고, 세례 교인이 103명으로 17명이 늘었으며, 유아 세례교인이 5명으로 3명이 줄었고, 그해 세례를 받은 성인이 15명으로 7명이 줄었다. 주일학교는 한 곳이 늘어 다섯 곳에 있었는데 직원과 교사는 5명이 준 14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18명이 많아 133명이었으며 평균 103명이 출석했다. 주일학교에서 15명이 회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엡워스 고등부 연맹이 조직되어 44명이 등록하였던 것은 쾌거였다. 1년 전과 같이 이 지역에 예배당이 3곳에 있었으며 총 시가가 700달러였다. 선교를 위하여 작년보다 29달러가 많은 30달러를 해외선교 헌금으로 드렸다. 교육을 위하여 지난해와 같이 일반 교육 헌금으로 1달러를 드렸으나 어린이 기금은 드리지 못했다. 주일학교를 위하여 지난해와 같이 교회에 1달러를 헌금했다. 그리고 작년과는 달리 흑인 보조회에 헌금하지 못했고, 미국 성서회에 1달러가 적은 1달러만 드렸으며, 부인지선교회에도 드리지 못했다. 훈련 기금으로 6달러가 많은 33달러와 지역 교육 관심에 25달러를 헌금하여 총 58달러를 헌금하였다

1910년 3월에 김봉기는 2년 전에 파송을 받았던 하와이 섬의 올나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고, 박화B도 같은 지역에 권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홍한식이 올나 한인 감리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고, 그는 하갈나우 한인 감리교회와 힐로 한인 감리교회까지 파송을 받아 세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달에 보고된 올나 한인 감리교회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학습 교인이 43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42명이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이 1명이었고, 그해 2명이 성인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으며 6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66명이었지만 평균 출석은 53명이었고, 13명이 회심을 하였다. 엡워스 고등부 연맹에 23명이 등록하였고, 예배당 건물 1동이 있었으며 시가는 250달러였다. 해외 선교비로 18달러를 헌금했다.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를 헌금했으며, 흑인 보조비로 1달러를 헌금했고, 부인 내지선교회에 1달러를 헌금했다. 총 훈련비는 21달러였다.

1911년 1월 17일부터 18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다.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올나 한인 감리교회 교세를 1년 전의 교세와 비교하면 작년보다 약간 저조했음을 알게 된다. 학습 교인이 10명이 적은 33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2명이 적은 40명이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이 1명으로 같았고, 그해 8명이 더 많은 10명이 성인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으며 1명이 더 많은 7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8명이 적은 58명이었다. 엡워스 고등부 연맹에 4명이 많은 27명이 등록하였고, 작년과 같이 예배당 건물 1동이 있었으며 시가는 250달러였으며 건물 수리비로 22달러를 지출했다. 작년과 같이 내지 선교비로 18달러를 헌금했고,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를 헌금했으며, 흑인 보조비로 1달러를 헌금했고, 부인 내지선교회에 1달러를 헌금하여 총 22달러를 상납했다.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봉기를 하와이섬 올나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작년에 파송되었던 박화B를 같은 섬의 파팔노아 한인 감리교회로 파송하였다. 홍한식이 작년에 이어 올나 한인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하갈나우 한인 감리교회와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파송하였다. 그래서 홍한식이 없을 때는 김봉기가 작년과 같이 목회하게 되었다. 

1912년 이후 1915년까지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의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김봉기의 사역을 볼 수 없다. 그리고 1916년 이후 그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서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12.0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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