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관여(金官汝)는 고종 15년인 1878년의 11월 19일에 한국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하였다. 26세가 되던 1904년 11월 27일에 그는 고베에서 ‘매그놀리아’ 기선에 올랐다. 당시 그는 결혼을 하였지만, 아내를 여윈 홀애비였다. 그는 약 2주간 태평양을 건너 다음 달인 12월 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영문 표기인 Kim Kwan Yer로 통했다.
김관여는 호놀룰루에 온 지 6년이 되었다. 그해 서른세 살이 되던 1910년에도 하와이섬 하마구아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했다. 그해에 같은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던 33세의 박호봉과 25세의 오궁웅과 함께 거주하였다. 이들 모두는 미혼남이었는데 박호봉은 김관여가 호놀룰루로 온 그해에 왔고, 오궁응은 이듬 해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
이후 김관여는 호놀룰루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규연과 전경준 등과 함께 하와이 구세군 정령인 브란취 칵스 부인을 찾았다. 칵스부인은 1883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사역하였고, 인도에서 단기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한 적도 있었다.
칵스 부인의 후원으로 1912년 10월 15일에 하와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한인 구세군 영문이 설립될 수 있었다. 그해 12월 10일에 호놀룰루의 구꾸이 스트릿에 월세로 건물을 임대하여 한인 구세군 영문을 세웠다. 교인이 적을 때는 15명이었고, 교인이 많을 때는 40명이었다.
그해 구꾸이 스트릿에서 빈야드 스트릿 가까이에 있는 리버 스트릿으로 구세군 한인 영문을 이동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이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약 300명의 한인 소년과 소녀가 참석한 가운데 한인 사회의 큰 행사가 되었다.
구세군 한인 영문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에 힘쓰는 한편 성령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성령 학교에서 고아를 양육하였고, 어린이를 위하여 국어 교실을 개설했다. 이 성령 학교는 재정적으로 곤란하여 1937년 2월에 문을 닫았다.
1913년 7월에 29세의 이규연과 16세 된 송마르타 (Martha Shong)가 결혼했다. 송마르타는 그해 한국에서 호놀룰루로 이동한 사진 신부로 한국에서 여학교를 나온 인테리였다. 창립 이듬해인 1913년 10월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창립기념일을 개최했다. 그런데 5일이라고 적혀 있어 설립 날짜가 15일이 아니고 5일인지 모르겠다.
김관여는 1916년경에 23세 어린 정호연과 결혼했다. 정호연은 1901년에 태어나 홍 씨와 결혼하여 왈터라고 불린 태봉과 프랭크라고 불린 태수를 낳았다. 김관여와는 재혼한 상태였다. 김관여는 정호연에게서 딸 클라라와 로즈 그리고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구세군 영문은 민찬호를 크게 환영하는 예식을 가졌다. 이에 1919년 10월 25일에 국민보는 ‘구세군 교회는 민학사를 환영’이라는 다음의 기사를 냈다. “본항 한인 구세군 교회 형제자매들이 학사 민찬호 씨를 위하여 본 월 23일 오후 7시 반경에 베리탄니아 거리에 있는 해 예배당 안에 환영회를 열고 장관 이규현 씨가 주석하여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남녀 학생을 아울러 수백 명 동포가 출석하였으며, 민학사 급 승룡환, 윤계상, 안원규, 이내수 제씨가 환영에 대한 연설을 진술하여 일반 부모 형제자매로 하여금 융화한 덕의를 고취하였다더라.”
1920년 3월 18일 목요일에 김천일이 가와이섬의 리후에의 아카쿠이우에서 독감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그로브팜 농장 노동주선인이면서 구세군 영문의 사관을 보좌하는 부교였다. 그는 부교로서 영문을 위하여 애쓰며 신실하게 영문을 섬긴 영문지도자로서 많은 사람에게 높이 존경받았다. 특별히 그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에 따라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도울 자세를 지녔고, 할 수 있는 대로 무엇이든 도우려고 노력했다. 구세군 한인 사관이나 병사뿐만 아니라 많은 한인이 그의 먼저 감을 애석해했다. 이날 부조한 사람 가운데 구세군 사관 이름이 보이고, 많은 사람이 구세군 병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이날 부조한 명단이다: 안재덕, 이윤대, 이규현, 이재연, 김달룡, 한덕재, 임덕순, 문 윤, 김진옥, 오두령, 박용주, 오대경, 김경선, 박재선, 로원식, 박성문, 문원서, 박문범, 김용진, 박경일, 이하주, 송공선, 김경락, 남득도, 윤희중, 박주범, 문달룡, 오대유, 김경식, 김유호, 고치운, 김순성, 공명운, 최원숙, 곽종래, 김인길, 남경애, 서축삼, 김덕찬, 전홍삼, 최재덕, 최영신, 한길수 정만서, 정용만, 박종학, 이동빈.
그해 8월에 와일루아 지방에 거주하던 구세군 영문 사관이었던 박호병의 부인 김숙안이 별세하였다. 구세군 영문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에 큰 슬픔을 맞았다. 호항 구세군 백인 영문에서 62달러 50센트를 부조했고, 부인 제회가 10달러를 부조하는 등 백인 구세군 영문에서도 함께 위로에 동참했다. 김관여는 안재덕과 함께 한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5달러를 부조하여 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했다.
하와이 일본 총영사가 1922년에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한인 구세군 지도자 명단에 김관여 외에도 이규현, 한길수 그리고 조경천이 있었다. 이 이규현이 이규연으로 보인다.
김관여는 1924년경에 18세 어린 박메리와 재혼했다. 박메리도 재혼한 상태했다, 박메리는 1896년 5월 25일에 한국에서 어머니 김마르타에게서 태어났고, 김애기로 불렸다. 김애기가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명을 받아 메리로 불린 듯하다. 그녀의 어머니 김마르타는 김메리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어머니 김마르타가 사탕수수밭에서 거주하면서 부엌과 세탁소에서 허드렛일하는 동안 딸 김애기는 수잔나 웨슬리 홈에서 거주했다.
1925년에 김관여는 호놀룰루에서 거주했다. 그는 카우일라 길 29번지에 살면서 A.M 브라가가 운영하던 이발소에서 이발사로 재직했다. 김관여는 박메리에게서 1925년에 룻을 낳았고, 1928년에 베티를 낳았으며 1931년에 얼을 낳았다.
1940년에 예순네 살의 김관여는 호놀룰루에서 이발소를 경영하였다. 마흔한 살의 아내 박매리와 딸 클라라, 아들 윌리엄, 딸 룻, 딸 베티 그리고 아들 얼과 함께 거주했다. 클라라는 스물세 살로 직업이 없었으나, 스무 살의 아들 윌리엄은 신문사에서 부편집인으로 활동했고, 다른 세 자녀는 학생이었다. 열다섯 살의 룻은 9학년, 열두 살의 베티는 6학년 그리고 아홉 살의 얼은 2학년이었다. 5년 후인 1945년에 윌리엄이 호놀룰루에서 결혼하였다.
1950년에 김관여는 은퇴하고 호놀룰루에서 거주했다. 쉰 살의 아내 박매리는 호텔에서 세탁소 보조로 활동했고, 스무다섯 살의 딸 룻은 전화국 직원으로 취직하였으며, 서른세 살 된 딸 클라라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네 살 먹은 손녀 달린 어니스트슨이 함께 거주했다.
김관여는 1952년 6월 19일에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향년 일흔네 살로 소천했다. 그는 호놀룰루에 있는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박매리는 남편 김관여가 소천한지 26년이 되던 1978년 1월 7일에 향년 여든두 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김관여와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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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