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박호병은 1880년에 한국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26세가 되던 1906년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자기 이름을 Pak Ho Biong 또는 Pak Ho Byung으로 표기했다.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
1912년에 박호병은 호놀룰루에서 거주했고,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을 개척하는데 함께 했다. 그해 이규연과 전경준 등과 함께 하와이 구세군 정령인 브란취 칵스 부인을 찾았다. 칵스 부인은 영국에서 구세군 영문을 섬기던 중 단기간 인도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한 적도 있었는데 1883년에 하와이로 전임되었다.
칵스 부인의 후원으로 1912년 10월 15일에 하와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한인 구세군 영문이 설립되었고, A.C. 닐슨 정위가 한인 목양 책임 사관이 되었다. 그해 12월 10일에 호놀룰루의 구꾸이 스트릿에 월세로 건물을 임대하여 한인 구세군 영문을 세웠다. 교인이 적을 때는 15명이었고, 교인이 많을 때는 40명이었다.
그해 구꾸이 스트릿에서 구세군 한인 영문을 세웠는데 빈야드 스트릿 가까이에 있는 리버 스트릿으로 구세군 한인 영문을 이동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이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소년과 소녀 약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크리스마스트리 축제는 한인 사회의 큰 행사로 치러지게 되었다.
구세군 한인 영문은 한편 한인들을 전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성령 학교를 설치하여 두 가지 사역을 추진하였다. 이 성령 학교에서 고아를 양육하였고, 어린이를 위한 국어 교육에도 힘썼다.
창립 이듬해인 1913년 10월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창립기념절을 개최했다. 그런데 5일이라고 적혀 있어, 오타가 아니라면 설립 날짜가 15일이 아니고 그보다 열흘이 앞선 5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29세의 이규연 사관이 1913년 7월에 16세 된 송마르타 (Martha Shong)와 결혼했다. 송마르타는 1897년 9월 7일이나 이듬해인 1898년 10월 15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송마르타는 한국에서 여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으며,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이동하였다. 결혼 후 송마르타는 남편의 성을 따라 이마르타 (Martha Yi)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박지설이 1915년 5월 24일에 사진 신부였던 어린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호놀룰루에서 발생했다. 판사는 잔인한 살인 혐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다음 달 27일 아침에 박지설은 발렌틴 신부에게서 가톨릭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영세를 받았다. 죄수복 대신에 자신이 평소에 입었던 사복을 입고 교수대에 서기를 원했는데 사복을 가져다준 자렛 보안관에게 촌각을 다투는 마지막 인생길에서 박지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였다. 가깝게 지내던 4명의 한인 친지가 그를 만나 손이나마 잡아보고 싶어했지만, 박지설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짧은 글을 적은 쪽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 날 28일에 교수대에 들어서서 올가미를 마주했을 때 박지설이 약간의 감정을 드러냈다. 영세는 영어로 받았지만, 마지막 형장의 순간에 한국어로 기도를 받기 원했으므로 구세군 한인 영문을 담임한 박호병이 구세군 한인 영문 개척을 위해 수고한 블란취 B. 칵스 정령과 구세군 한인 목회 책임 사관인 A.C. 닐슨 정위와 함께 방문했다. 박호병은 큰 소리로 간절하게 사형수인 박지설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 눈물을 뿌리면서 기도했다. 기도를 함께 한 직후 교수형에 처한 그는 의사의 검진 후 검정색으로 페인트칠한 거친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되어 마키키 공원묘지에 묻혔다. 애드버타이저가 보도한 박지설의 사건을 복사하여 1915년 6월 29일에 보도한 하와이안 가제츠에 따르면 박호병은 사형수 박지설 만큼이나 크게 감정을 드러내면서 반 히스테리칼하게 기도했다고 보도했다. 이렇듯 조국을 떠난 한인의 이민 생활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복음만이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38세의 박호병은 1916년 8월 3일에 호놀룰루에서 H.N. 팀머만 구세군 사관의 주례로 사진 신부로 보이는 20세나 적은 18세의 김숙안과 결혼했다. 이날 김연이 부부가 박호병 부부의 결혼 증인으로 섰다. 박호병은 김숙안에게서 진한, 진옥, 진문 그리고 프란시스라고도 불린 진찬을 두었다. 진한은 몇 년에 태어났고, 진옥은 1917년에 태어났으며, 진문은 1918년에 태어났고, 진찬은 1921년에 와히아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지나다가 27살이 되던 1938년에 하와이로 이주했다.
1910년대에 평양 숭실대학 대표 14명이 호놀룰루를 방문했다. 오하후 한인 사회는 그들에게 화환을 걸어주었고, 오하후 한인 사회 대표 12명은 그들과 함께 사진을 박았다. 박호병이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섰다. 민찬호 목사는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섰고, 안원규는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에 섰다.
1920년 3월에 그로브팜 농장 노동주선인으로 활동하던 김천일이 가와이섬의 리후에 카운티의 아카쿠이우에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그달 23일에 가우와이와 리후에서 발간되던 더 가든 아일랜드에 실렸다. 그는 구세군 영문 초급 하사관으로서 교회 일에 앞장섰고 신실한 사관이었고, 매우 높게 존경받았으며, 항상 주님의 이름으로 한 컵의 찬물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어떤 것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었다. 구세군 영문 교인 만큼이나 많은 한인이 매우 섭섭해했다. 아내와 다섯 자녀를 두고 그는 홀로 황급히 떠났다.
그런데 그해 8월 4일에는 가와이 섬 와일루아 지방에 거주하던 구세군 교회 전도사인 박호병의 부인 김숙안이 별세하였다. 결혼 4년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당시 김숙안 부인은 22세에 불과했다. 원근 각지에 거주한 일반 부모와 형제자매 수십 명이 장례예배에 참석하여 위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한 금액을 부조하여 진실로 동족상보가 아닐 수 없었다. 박호병은 국민보를 방문하고 그곳 동포의 후의를 감사하는 글과 부조한 이들의 성명과 금액을 본보에 기재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달 31일에 국민보는 ‘와일루아 동포의 사랑’이라는 제하로 그가 쓴 아래와 같은 기사를 실었다. “천지의 변화는 일월성숙의 순환을 의지함이오. 인생 백년의 생명의 장단과 화복유무는 상주께 달렸도다. 세속의 변화를 따라 교제가 와일루아 농장으로 이거하온 후 모든 동포 제위의 인애여기하는 하해지덕을 입사와 가정이 무화다락하여 지내옵다가 천의를 의지하여 이달 초 4일에 교제의 실인이 세상을 떠나 모든 동포들께옵서 사업을 정지하시고 장례식에 참례하사 깊은 동정을 표하신 후 겸하여 귀한 재정까지 다대히 완조하여 주셨사오니 제위의 후의치덕은 감히 나의 일신으로 다 갚지 못하겠나이다. 교제 박호병.” 위의 기고문에서 박호병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감사하는 예절을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다.
위의 국민보에서 부조한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아래와 같이 읽을 수 있다. 호항 구세군 백인 사관과 사병이 62달러 50센트, 부인 제회가 10달러, 안재덕과 김관여가 각각 5달러, 이윤대와 이규현이 각각 3달러, 이재연과 김달룡과 한덕재와 염덕순과 문 윤과 김진옥이 각각 2달러, 오두령이 1달러 50센트, 박용주와 오대경과 김경선과 박재선과 노원식과 박성문과 문원서와 박문법과 김용진과 박경일과 이하주와 송공선과 김경락과 남득도와 윤희중과 박주법과 문달룡과 오대유와 김경식과 김유호와 고치운과 김순성과 공명운과 최원숙과 최종태와 김인걸과 남경애와 서축삼과 김덕찬과 전흥삼과 최재덕과 최영신과 한길수가 각각 1달러, 정만서, 정용만, 복종학 그리고 이동빈이 각각 50센트를 부조하였다. 그리고 유아를 위하여도 부조하였는데 김달영이 5달러, 요시다가 3달러, 조매륜과 홍철수가 각각 1달러를 부조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박호병이 담임하던 구세군 한인 영문 사관과 사병일 것이다.
첫째 부인 김숙안이 소천한 지 3년이 되던 1923년 4월 16일에 오아후섬에서 박호병은 남편을 사별한 배유수와 재혼했다. 배유수는 1898년 4월 16일에 한국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배상진과 어머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진 신부로 호놀룰루에 입항하여 입항한 지 3일이 되던 1916년 3월 15일에 12년 전에 하와이로 이주한 14살이나 많은 김청운과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회에서 결혼하고, 오아후섬의 와이아루아에서 거주하였다. 배유수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랄프, 바바라 등을 낳았다. 박호병 부부 가정에 1926년에 로이드라고도 불린 진명이 태어났고, 그 후 아브라함이라고도 불린 진한이 태어났다.
구세군 한인 영문이 1924년을 전후하여 호놀룰루의 노스베레타니아 스트리트 길 선상에 있었다. 그해 한 군영 모임에 20여 명의 성인과 10여 명의 어린이가 참석하여 예배를 드린 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 교인 중에는 양장을 한 분도 있으나 한국 고유의 한복을 차려입는 자들도 보인다.
1933년 5월에 박호병이 한국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거주하는 아들을 만나 하와이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을 것 같다. 그런데 선박 서류에 박호병이 상인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이즈음에 구세군 사관직을 그만둔 것으로 보이나, 자비량으로 영문을 목회했을 수도 있다.
둘째 부인 배유수는 1958년 1월 31일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5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호놀룰루에 있는 누아누 기념 공원에 안장되었다. 박호병의 마지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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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