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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이규연 (1884-196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규연은 1884년 9월 15일에 한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달 18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는 한국에서 구세군 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 7월 8일에 몽고리아 선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20세의 기혼 남성이었던 이규현이 이규연인 것 같다. 이규현은 하와이에 오기 직전에 한국에서 문화군 홀메리에서 거주했다. 그런데 그가 이규연 외에도 이규현으로도 쓰여졌다.

이규연은 영어로 Kyu Yun Yi로 표기했고, 영어 이름으로 해리 (Harry)를 사용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였다.

 

호놀룰루 한인 구세군 영문 

 

191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응한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4,500여 명이었고, 하와이 총인구의 2.4%였다. 이는 11.3%의 중국인에 비해 적었고, 41.5%의 일본인에 비해 휠씬 적은 숫자였다. 

이규연은 전경준 등과 함께 하와이 구세군 정령인 브란취 칵스 부인을 찾았다. 칵스부인은 1883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사역하였고, 인도에서 단기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한 적도 있었다. 

칵스 부인의 후원으로 1912년 10월 15일에 하와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한인 구세군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해 12월 10일에 호놀룰루의 구꾸이 스트릿에 월세로 건물을 임대하여 한인 구세군 영문을 세웠다. 교인이 적을 때는 15명이었고, 교인이 많을 때는 40명이었다.

이규연은 사관학교 출신의 사관이 아니라 별정직 사관으로 보인다. 그해 구꾸이 스트릿에서 빈야드 스트릿 가까이에 있는 리버 스트릿으로 구세군 한인 영문을 이동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이 크리스마스추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소년과 소녀 약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 사회의 큰 행사가 되었다. 

이규연 등은 전도하는 한편 성령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성령 학교에서 고아를 양육하였고, 어린이를 위한 국어 교육에 힘썼다. 이 성령 학교는 1937년 2월에 재정적으로 곤란하여 문을 닫았다. 

창립 이듬해인 1913년 10월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창립기념절을 개최했다. 그런데 5일이라고 적혀 있어 설립 날짜가 15일이 아니고 5일인지 모르겠다. 

이규연은 29세가 되던 1913년 7월에 16세 된 송마르타 (Martha Shong)와 결혼했다. 송마르타는 그해 한국에서 호놀룰루로 이동한 사진 신부로 보인다. 송마르타는 1897년 9월 7일에 한국에서 어머니 김 씨에게서 태어났다. 그런데 1898년 10월 15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송마르타는 한국에서 여학교를 나온 인테리였다. 결혼 후 송마르타는 남편의 성을 따라 이마르타 (Martha Yi)로 개명했다.

1918년 5월 5일에 첫째 딸 이바가 호놀룰루에서 태어났고, 2년 뒤인 1920년에 아들 동진이 태어났다. 아들 동진이 태어나던 때 이규연은 적재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는데 그는 일하면서 구세군 영문을 섬긴 ‘텐트 메이커’였다.

1919년 10월 25일 자 국민보는 ‘구세군 교회는 민학사를 환영’이라는 다음의 기사를 냈다. “본항 한인 구세군 교회 형제자매들이 학사 민찬호 씨를 위하여 본 월 23일 오후 7시 반경에 베리탄니아 거리에 있는 해 예배당 안에 환영회를 열고 장관 이규현 씨가 주석하여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남녀 학생을 아울러 수백 명 동포가 출석하였으며, 민학사 급 승룡환, 윤계상, 안원규, 이내수 제씨가 환영에 대한 연설을 진술하여 일반 부모 형제 자매로 하여금 융화한 덕의를 고취하였다더라.”

이듬해 3월에 구세군 교회 하사관이었던 김천일이 가와이섬의 리후에의 아카쿠이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로브팜 농장 노동주선인으로 활동했다. 그해 8월에 와일루아 지방에 거주하던 구세군 교회 전도사인 박호병의 부인 김숙안이 별세하여 구세군 교회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에 큰 슬픔을 당했다. 이규연은 부조금 3달러를 내서 그 가정을 위로했다.

하와이 일본 총영사가 1922년에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한인 구세군 지도자 명단에 이규현 이외에도 김관여, 한길수 그리고 조경천이 있었다. 이 이규현이 이규연으로 보인다. 위의 자료에 따르면 이규현의 한자 표기는 李奎鉉이었다. 

1923년 3월에 셋째 딸 에스더가 태어났고, 1926년 7월에 막내딸 마거릿이 태어났다. 

 

한국 사역

 

1926년에 구세군 분규 사건이 발생한 후 배일수 사령관에 이어 두영서 참장이 군국사령관으로 승계되었고, 이후 사관들의 임지 이동이 이어졌다. 그해 6월에 경성 제1영문 (서울 정동 구세군 영문)에서 많은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제16기 사관 학생 임관 임명식이 진행되었고, 그들은 임지로 파송되었다. 2개월 후인 8월에 해외에서 사관의 충원이 있었는데 독일계 스위스인이었던 애나 해칠러 [하길란] 정위와 프랑스 출신의 M. 샤르미용 [차미령] 정위 그리고 하와이에서 사역하던 이규연 부부도 있었다. 이때 그들을 ‘부관’으로 소개했다. 이 부관이 위관 사관인 ‘부위’가 아닌가 한다. 

이규연 부부는 위의 두 외국인 사관보다 한 달 반 정도 빠른 그해 7월 30일에 세 자녀와 함께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해 8월 19일에 서기 장관이 인도하여 서울 정동에 있는 경성 제1영문에서 하와이에서 전근 온 이규연 부관 동부인을 위한 환영회가 있었다. 오랫동안 떠났던 한국에서 다시 사역하게 되어 목회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이들을 제물포 영문에 임명하였고, 이들의 목회가 크게 성공하기를 기대하였다. 제물포 영문은 1924년에 개척하였다.

그 후 이규연은 1931년 4월에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경성 제2영문 곧 오늘날의 구세군 아현교회로 부임하였다. 그는 제16대 임석길/김자순 참위 부부의 뒤를 이어 제17대 사관으로 부임하여 서양 선교사의 지도로 본 영문을 담임하였다. 당시 그는 참위였다. 아현 교회는 1916년 7월에 개척되었다. 그가 부임하기 2년 전인 1929년 5월 10일에 본 영문에서 구세군 육아홈을 신축하여 낙성식을 가졌다. 구세군의 창립자인 윌리엄 부트 대장의 탄생 100년 기념식과 함께 육아홈 창립 10주년 기념식도 함께 하였다. 부모 없는 고아를 양육하면서 보통 교육과 직업 기술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유용한 인격을 세워 창립 이래로 100여 명을 배출하였고, 1929년에 77명이 소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직조 제화 목공 등의 기술을 배웠다. 1933년 6월 4일 주일에 박준섭 사령관이 방문하여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기념 촬영을 하였는데 이 사진에서 앞줄 앉은 좌석의 맨우측과 맨 좌측이 이규연 사관 동부인이고, 가운데가 사령관 박준섭 동부인이고, 세 번째 줄 좌측이 1대 담임사관 올슨 정위, 그 줄 오른쪽 끝이 12대 담임사관 사도일 정위, 그리고 맨 뒷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1954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된 부람웰 실베스터 (설부열)이다. 이규연은 18대 이종봉 정위가 부임하던 1933년 6월 말까지 2년간 재직했고, 그의 뒤를 이어 제19대 노상섭 사관이 단신으로 부임했다. 

이규연 부부는 오늘날의 구세군 대구제일교회인 대구 제1영문, 경성 제1영문 그리고 해주 구세군 영문을 거쳐 서울에 있는 본영 상업부에 부임했다. 그는 본영 상업부에서 도서 외에 사관복, 예전, 문서, 전도지 등 관리용품을 제작하고 판매하였다. 그 후 경성 부지방관을 역임하였고, 구세군 대한 본영 구제부에서 사회 선교에 관한 사역을 펼쳤다. 그리고 난 후1941년 7월에 이규연이 경성 제2영문 제25대 담임으로 다시 부임하였지만 2개월간 재직했고, 이어서 경상북도에 있는 의성 영문과 오늘날의 원당 영문교회인 원당 영문을 담임하였다.

구세단 개편 3년 만인 1944년 11월 25일 밤에 아현 영문에서 장로교 대표 채필근 목사, 감리교 대표 정춘수 목사, 구세단 대표 사까모도 단장의 집례로 교사 안수식이 있었고, 12월 2일 밤에 영동에서 구세단 교사들이 별도로 모여서 안수식이 있었다. ‘교사’는 목사와 사관의 다른 호칭이었는데 일본에서 목사를 두고 사용하는 ‘선생’과 비슷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날 33명이 정교사로 안수받았는데 이중 이규연이 포함되었으나 이마르타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40년 이상 구세군 영문을 사역한 이규연은 동료 사관으로부터 호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코넷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코넷을 자주 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식 구세군을 한국에 심는 데 공헌했지만, 구세단을 개편할 때 단장 배척 문서에 서명하여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은퇴

 

이규연 부부는 1949년 4월 8일에 퇴직했다. 퇴직할 당시 이규연과 이마르타는 참령이었다. 구세군의 목회자를 사관이라고 하는데 사관은 구세군사관학교를 나와야 한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임관되면 부위가 되고, 임관 후 5년이 지나면 정위로 진급하게 되는데 이 부위와 정위를 위관 사관이라고 한다. 정위 진급 후 15년이 지나면 참령으로 진급하는데 사관학교 임관 후 20년이 지나야만 달 수 있는 영광스런 계급으로 참령을 영관 사관이라고 한다. 

이규연 부부는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2일에 요코하마에서 ‘W.H. 골던 장군’이라고 이름 지어진 군함을 타고 그달 1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들은 호놀룰루에서 가까운 카이루아에서 거주했다.

1955년 10월에 이규연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잠시 방문하여 국가적인 일정을 마친 후 20여 년간 사역하였던 구세군 교회를 방문하였을 것이다. 이규연은 하와이 호놀룰루 인근 카이루아에서 거주하다가 1962년 12월 28일에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에서 향년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호놀룰루 인근의 다이아몬드 헤드 기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사람을 섬겼다’라고 묘비에 새겼다. 남편의 소천 이후 18년이 되던 1980년 12월 14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이마르타는 향년 82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09.1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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