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광원(趙光元)은 1897년 10월 21일에 강화도 온수리에서 성공회 교인이었던 아버지 조에녹과 어머니 헤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막 N. 트롤로프 (조마가) 영국 성공회 선교사에게서 강화도 온수리 성 안드레아 성공회 성당에서 영세 받고 영세명을 노아로 한 것 같다. 그 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하였고, ‘우리의 의기와 책임’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 의식을 강조하면서 민족의식을 잃지 않았다.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는 서울 정동 성공회 성당에서 교리 문답 교사로서 활동했다. 1921년 4월에 정동 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제3회 전도구 연합회에서 전도 계획 수립과 민주적인 성당 운영 그리고 평신도의 참여를 결정하였을 때 조광원은 전도 장려부 설치를 위한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경성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사경회와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성공회 성장의 새로운 단초를 마련하였다.
사이판에서 만난 두 한국 주부
성 누가 성공회 성당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성 누가 성공회를 개척한 조병요의 후임으로 트롤로프 주교는 1923년 11월에 교리 문답 교사인 조광원을 호놀룰루 성 누가 성공회 성당으로 파송하였다. 그해 12월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자기의 이름을 영어로 Kwang Won Cho 또는 Noah Kwangwon Cho라고 썼다. 그는 호놀룰루 팔라마 지방에 있는 중국인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 성당 사제의 지도하에 본 성당의 한 방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1925년 2월 21일 저녁에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 성당에서 전경위와 유미니가 결혼식을 거행했다.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예배당에 친척과 친구 등 하객이 모인 가운데 신랑 들러리 박야곱과 신부 들러리 김페이스와 화동이 함께 하여 최근 가장 멋있는 한국인 행사였고, 결혼식 후 학교 강당에서 축하 파티가 있었다. 그들은 성 누가 성공회 성당의 성가대원으로서 가장 열심 있는 전도인이었다.
성 누가 성공회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지만 할 수 있는 한 헌금을 많이 하였다. 1925년 3월에 그들이 드린 헌금은 11달러 75센터였고, 성 매리 성공회 성당 교인이 드린 7달러나 성 마가 성공회 성당 교인이 드린 6달러에 비하면 많았다.
조광원은 직전 평신도 지도자였던 조병요와 함께 교인들이 헌금한 건축헌금 1,800달러와 미국 성공회가 보조한 700달러로 1925년 5월 3일에 팔라마 지방의 ‘카노아 레인’ 길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보조했고, 한국에 있는 고아원에 기부했다.
조광원은 신축한 성 누가 성공회 성당 안에 1906년부터 문을 열었던 국어학반을 세워 한국인 2세에게 국어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 국어학반은 1941년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위스콘신주 나쇼타에 있는 나쇼타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마친 조광원은 1928년 6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존 D. 라모디 주교로부터 집사 신부 곧 부제 성직 안수를 받아 해외에서 성직을 받은 최초의 한국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1930년 8월에 이승만 등이 호놀룰루에 ‘국어문화 및 역사 위원회’를 발기하였을 때 조광원은 민찬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광원은 1931년 5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S.H. 리틀 주교에게서 장로 신부 곧 사제성직을 받아 존 박 신부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정회원 신부가 되었다.
그해 9월에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인사들이 김유택 의사의 집에 모여 한인 청년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하고 임시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조광원은 홍한식 등과 함께 이사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무렵 조광원은 성공회 성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박용만이 설립한 조선독립단에 가입하여 하와이 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시사를 간행하였으며, 국민회에 가입하여 국민보 간행에 참여하였고, 1941년에는 한인 자위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첩자를 색출하였으며,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9월에 조광원은 미국 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하여 2개월간 사이판 전투에 참전하여 대일 선전공작에 참여하여 통역관으로 복무하였으며,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인을 구출하였다. 짐 루카스 종군 기자는 그의 활약상을 성조신문 전면에 실었다. 당시 사이판에는 한국인이 1,400명이 있었고, 인근 티니안에는 1,000명이 거주하였는데 이 중에 천주교 신자가 7명이었고, 개신교 신자가 6명이 있었으며, 독일이 지배한 적도 있었는데 루터교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마젤란이 이곳에 온 후 가톨릭 성당은 있었는데 일본이 점령하면서 기독교 활동을 전면 중단하였다. 그는 매우 청명하고 조용한 그해 7월 2일 아침에 사이판에서 한국인들이 만든 강단에서 최초로 성공회 예배를 인도했다. 부상 당한 남녀 성인과 그들의 자녀들이 출석한 가운데 성찬식을 하였고, 짧게 복음을 전했으며, 한국과 세계의 정세를 소개했다. 그는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을 구출하는 활동도 하였다. 많은 한인이 울면서 그에게 함께 거주하면서 복음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사이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이판을 떠난 그는 호놀룰루로 돌아와 성 누가 한인 성공회 성당 신부로 복귀했다.
1938년부터 성 누가 성공회 교인들이 새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건축헌금을 모금하였다. 종일 일한 부인들이 저녁에 성당에 모여 음식을 만들었고, 젊은 사람들은 주중에 친구나 성당 교인들에게 팔았다. 하루에 초라한 한 끼만 먹으면서 건축헌금으로 450달러를 헌금한 CH홍은 조광원에게 ‘아시는 대로 제가 다리를 절어 자선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먹지 않고 하나님의 돈을 저축하여 하나님의 새집을 짓는데 헌금합니다’라고 말했다. 조광원이 은퇴한 다음 해인 1951년까지 성 누가 성공회 성당 교인들은 15,000달러를 헌금하여 1952년에 ‘가나티 레인’ 길에 교당과 신부 주택을 건축하고 그해 7월 13일에 낙성식을 거행했을 때 홍 교인의 헌금으로 성당 종을 마련하여 성당에 달았다. 그런데 조광원의 뜻에 따라 그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강화도 온수리 성 안드레아 성공회 성당 비슷하게 성 누가 성공회 성당이 지어졌다.
1945년 8월에 조광원은 미군 군종신부로 한국에 파견되어 미군정 통위부의 미군 책임자 고문으로 2년간 활동했다. 한국에 간 지 다음 해 2월에 전후한국구제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에 그는 다시 성 누가 성공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가 27년간의 시무를 끝으로 1950년에 은퇴했고, 이듬해 김은태 사제가 조광원의 사목을 이었다.
6.25전쟁이 나자 조광원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 성공회의 초청으로 고베 교구 사제가 되어 1957년까지 사목하다가 그해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 온수리 성당 관할 사제로 시무하였다. 1960년 2월에 대한 성공회가 NCC에 가입하면서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9월에 성 미가엘 신학원이 성직 후보자 교육을 시작했을 때 가르쳤고, 이때 신자의 생활과 성인들의 생애 등을 출판했다.
조광원은 1972년 10월 7일에 향년 75세로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에 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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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