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박안득은 세계 제2차 대전 징집 서류에서 1905년 5월 19일에 태어났다고 적었는데 1940년과 1950년에 실시한 연방정부 인구조사에 적힌 나이로 보면 1907년이나 1909년에 태어난 것처럼 간주할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제물포 곧 인천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1933년 3월에 일본 고베에서 아사마 마루에 승선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주 초청을 받은 회사가 없고,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나 영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선박 승객 서류에 적혀 있는 것과는 달리 박안득은 라나이섬의 한 가운데 있는 라나이 시티에 있는 하와이 파인애플 회사에 취직하여 창고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하와이 사람들은 박안득을 앤드루 박으로 불렀다.
박안득은 1930년도 말에 안점순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918년경에 하와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듬해에 가정을 둔 그의 연봉은 1,080달러였다. 그와 그의 가정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파송한 이관묵 목사가 시무하는 라나이 한인교회에 출석했다. 1939년에 이들 사이에 딸 린다가 태어났고, 1942년에 둘째 딸인 코렌이 태어났다.
라나이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하던 이관묵 목사 부부가 소천하였으므로 하와이 선교연회는 박종수 목사를 4개월간 임시 목사로 본 교회에 파송하였다. 그런데 1944년 3월에 모인 제39회 하와이 연회에서 윌리엄 H. 프라이 감리사가 정식 담임 목사를 파송할 때까지 라나이 한인교회에 출석하던 박안득을 박종수 목사의 뒤를 이어 라나이 한인교회 전도사로 파송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그를 하와이 선교연회 절제위원회 위원으로 정의조와 안창호 등과 함께 선정했다. 그해에 라나이 시티에는 미국 북감리교 산하 교회로는 한인교회뿐이어서 박안득을 파송하는 특별한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박안득은 하와이 선교연회 파송 전도사로 라나이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했다.
그해 4월에 김매리가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찬양대를 인도하였다. 그달에 있은 성금요일 저녁에 박안득이 요한복음 20장을 읽고 ‘십자가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는데 온 교인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틀 후 부활주일 아침에 주일 학교 주최로 부활절 예배를 드렸으며, 주일 학교 학생에게 달걀에 색을 칠해서 나누어주고 부활의 의미를 심어 주었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섬기던 김원섭이 건강이 좋지 않아 자택에서 요양하였고, 하명선은 뇌출혈로 이곳 병원에 입원하여 걱정이 많았다. 박안득의 부인이 그해 8월에 주일학교 소년반을 맡아 가르쳐 교인들이 감사했다. 라나이 병원에 입원한 하명선이 그해 11월 초에 농주의 배려로 양로원에 들어갔는데 교인들이 이를 주선한 농주에게 감사하였다. 한기원의 딸 한배티가 그해 8월에 다시 풍금 반주자가 되었다.
그해 11월에 추수감사절에서 박안득이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찬양대는 특별 찬송을 준비하여 연주했다. 그달에 풍금 반주자 한베티의 매형인 칭애니가 주일 학교 교사로 임명받아 가르쳤다. 성탄절 이브였던 12월 24일 저녁 6시 반에 온 교인이 예배당에 모인 가운데 주일학교가 성탄 행사를 연출하여 크게 환호했다. 이날 김성수가 예배당 내부를 단장하였고, 박 부인과 칭 부인이 순서를 주장했으며, 부인회가 예물과 저녁을 준비했고, 이정근이 성탄 헌금위원으로 수고했다.
1945년 정월에 이곳 한인들이 노동하는 농장의 농주가 라나이 한인교회 예배당을 무료로 수리해 주었으므로 온 교인이 크게 감사했다. 본 교회에 있는 봉사기는 라나이에 오직 하나뿐인데 푸른 별이 10개 다 달렸다고 한다. 그달에 박춘식 부부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 모두 기뻐했다.
그해 3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 박안득이 소속된 하와이 선교연회 절제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와이에는 한 사람에게 일주일에 946g의 음주만 허용되었는데도 사고와 사건이 빈발하였는데 허용량을 인상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을 각 교회가 저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각 교회 목회자가 교인의 자녀들에게 미니 로위가 쓴 그레이 버니의 어린이와 그레이 버니의 어린이 교육이나 건전한 영화인 ‘수효를 셈하는 두뇌’를 사용하여서라도 무절제의 악이 침범하지 않도록 교육할 것과 일 년에 두 번 절제 주일을 지정하여 지키라고 강력하게 당부하였다.
1945년 2월에 박안득이 소속한 하와이 선교연회 절제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째, 목회자가 주선하여 금주에 관한 영화를 교회 청소년이 관람하도록 하고 금주에 관한 팸플릿인 소리를 많이 구해 청소년의 손에 쥐여주고 음주는 몸을 해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며, 둘째, 금주의 행복과 기쁨을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방안을 연구하고, 하와이 정부와 미국 연방정부에 넓게 접촉하여 금주를 해결할 방법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1933년 3월 일본 고베에서 호놀룰루에 도착
1944년 하와이 선교연회 파송 전도사로 라나이 한인감리교회 목회
1945년 2월 소속 하와이 선교연회 절제위원회 두 가지 제안
1945년 2월에 보고된 대로 한 해 동안 5명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학습 교인 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2명이 이명해 나갔거나 사망하여 활동 교인이 31명이었으며, 등록된 교인은 36명이었고, 주일 학교에 평균 20명이 출석했고, 이중 아기가 10명이었다. 그리고 건물 비용으로 375달러와 건물 유지비로 250달러를 지급하였으며, 사례비로 하와이 선교연회가 보조한 600달러와 교인들이 헌금한 240달러를 합하여 840달러를 지급했다.
박안득은 1946년 1월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3년간 활동해온 절제위원회에서 사회행동위원회로 임명받았다. 이듬해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감리사 윌리엄 푸라이 박사는 박안득이 재능 있는 아내의 내조를 받아 지난 한 해 동안 단호하고 용감하게 교인들과 함께 교회 목회에 임했다고 칭찬하였다. 그해 보고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세 명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어린이 세례와 입교 받은 사람이 두 명이었으며, 성인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등록한 학습 교인은 12명이었고, 등록한 세례 교인은 43명이었다.
박안득은 1950년에도 라나이 한인교회 전도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그해에도 라나이 파인애플 회사에서 일주일에 40시간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그의 아내 안점순도 함께 근무했는데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박안득은 1952년에도 전도사로 임명받아 설교 목사로 라나이 한인교회에 파송을 받았으며, 안창호 등과 함께 하와이 선교연회의 전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해 초에 호놀룰루 웨슬리 감리교회에서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바로는 지난 한 해 동안 2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공부반에 등록한 학생이 12명이었으며, 활동 교인이 32명이었으며, 비활동교인이 6명이었고, 2명의 교인이 이명해 나갔고, 교인 한 명이 사망하는 슬픔을 맞았다. 주일학교에 직원과 교사가 3명인 가운데 유아가 9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12명이었는데 평균 10명이 출석했다. 주일학교를 위해 75달러가 소요되었고, 기타 45달러를 운영비로 사용했다. 교인이 헌금한 액수가 120달러였으므로 활동 교인 1인당 3.75달러를 헌금한 셈이다. 사용하던 예배당은 당시 시가가 300달러였다.
1953년 2월에 보고한 수입 결산이 지난해의 절반인 45달러였으므로 많은 교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였다. 1955년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 연회관계위원회가 박안득의 회원직에 대하여 질문했는데 1958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에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그는 1944년 이후 1958년까지 14년간 라나이 한인교회 선교사역을 감당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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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