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민함나(閔함나)는 1888년 10월 20일에 경기도 부평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14년 1월 20일에 하와이 이민선 차이나호를 타고 사진 신부로 하와이로 이주하여 서울에서 출생한 11살 많은 민의식과 결혼하고 오아후섬 하우라에서 거주했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이함나였지만,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서 민함나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영어 이름을 Ham Na Minn으로 표기했다. 그녀는 한인기독교회를 섬기면서 대한인부인구제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겨레 사랑과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했다.
민함나는 오아후섬 와히아와로 이동하면서 이곳 한인기독교회에 출석하였다. 하와이로 이주한 지 5년이 되던 1919년에 삼일 만세운동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그달 15일에 부인공동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하였고, 그달 29일에 제2차 부인공동대회를 열고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였으며, 4월 1일에 하와이에 있는 모든 단체의 여성대표가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하와이 한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독립을 후원하는 데 그녀가 앞장섰다.
1930년 12월에 동지식산주식회사 주주총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 대한인부인구제회는 동지회측과 교민단측으로 분열되었는데 민함나는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9월에 대한인부인구제회 통상대표회가 모였다. 마위 지방, 힐로 지방, 고나 지방, 호항지방 그리고 와히아와 지방의 대표가 출석하였는데 민함나는 이완순과 함께 와히아와 지방대표로 참석하였다. 민함나는 배신실과 함께 1938년에 대한인부인구제회 와히아와 대표를 지냈다.
민함나는 1939년에 대한인부인구제회 힐로 지방대표를 맡으면서 대한인부인구제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중앙부장 김해김을 보조했다. 그해 중앙부의 다른 임원으로는 서기 정사원, 재무 김유실, 이사원 안득은, 전영복, 김정숙, 엘리자베스 김이 있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그 후 민함나는 호놀룰루 남쪽 카이무키에 집을 구매하여 이동하였다. 1940년 1월에 힐로 교회, 마우이 교회, 와히아와 교회 그리고 호놀룰루 교회의 평신도대표가 모여 평신도 대표회를 열었다. 그녀는 이종관, 김이제, 이원순, 김유실과 함께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평신도대표로 참석했다.
그달에 미포 동지대표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민함나는 나성 대표가 되었고, 기타 대표로는 손노디가 몬태나를, 안현경, 민근호, 김이제, 문인화, 서기춘이 호놀룰루를, 김재한이 와히아와를, 김치현이 마우이를, 김일만이 힐로를, 홍진표가 기아후를, 이상옥이 코나를, 이영옥이 와이낙구를, 손노디가 몬태나를, 이원순이 뉴욕을, 김영기가 시카고를 그리고 배일진이 라나이를 대표했다.
1941년 1월에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대회가 소집되었다. 민함나는 김창순, 이종관, 문인화, 이유실과 함께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기타 참석한 자는 와히아와의 김국경, 힐로의 양흥엽, 마우이의 김치현, 나성의 김이제였다. 그런데 그해 2월에 알려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임원 명단에서 민함나는 정순이, 이영옥, 매튠조, 백인숙, 전영복, 심영신, 이복수, 김유실, 안득은, 엘리자베스 김, 조해나와 함께 집사였다.
그해 3월에 대한인부인구제회 제19차 대표회에서 민함나는 중앙부장으로 선출되어 그해 8월에 라나이를 방문하여 구제사업을 펼쳤으며, 1943년까지 중앙부장을 역임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아랫줄 왼쪽에서 첫째가 민함나)
민함나의 묘비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을 하나로 하기 위하여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심영신과 함께 민함나는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민함나는 동지회측 대표였고, 심영신은 국민회측 대표였다. 해외한족대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 동지회측과 국민회측이 각각 대표를 파송하는 등 1930년 이래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안창호 계열의 국민회로 분열되었던 미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통합되었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지역적 특성상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두고, 북미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다. 그해 5월에 의사부를 조직하였는데 위원장에 이원순, 부위원장에 안원규, 영문 비서에 김원용, 국문 비서에 도진호, 재무에 조병요와 손승운, 검사위원에 차신호, 국방위원에 검현구가 선임되었고, 민함나는 강상호와 심영신과 함께 의사위원에 선임되었다.
김창순, 이종관, 문인화, 김유실과 함께 민함나는 그해 12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대표로서 1941년에 이어 1942년에도 선임되었다.
1942년 2월에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독립금 수봉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자금의 대대적인 모금을 꾀했다. 민함나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에 뛰어들어 호놀룰루의 누아누우 길에서 릴리하 길까지 독립금 예약을 담당하였고, 다음 해까지 맡아 감당하였다.
주미 외교위원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간에 갈등과 분쟁이 확대되면서 1943년 12월에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자 동지회 대표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 참여한 민함나는 김영기, 안현경, 도진호, 정영옥 등과 함께 동지회와 결별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남아 활동하였다. 이듬해 5월에 민함나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그녀는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맡았다.
민함나는 1946년 2월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결성된 전후 조선 구제위원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부회장에 최준경, 총무에 엄에스더, 서기에 안정송, 회계에 김봉순과 권희경, 평의원에 박금우, 김보광, 정영옥 그리고 김순희가 있었고, 고문으로는 한국인으로 조광원과 정이조, 미국인으로 길버트 마을스 등 5명과 중국인 밀두렛 송, 필리핀인 엔 씨빌나뉴바가 있었다. 민함나를 중심으로 조선 구제위원회는 815광복 후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을 위하여 의복, 신발, 담요 등 많은 구호품을 모아 국내에 지원했다.
1950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민함나는 1952년 9월 4일 6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오아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8명의 자녀를 두었고, 남편 민의식은 1965년 2월 14일에 소천하여 아내 옆에 누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에 나라 사랑을 높이 평가하여 민함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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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