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정두는 1864년 1월 22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상수구박’(Sang Soo Koo Pak)에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40세가 되던 1904년 5월 8일에 같은 나이의 부인과 함께 8살 된 아들 종철과 3살 된 아들 종환을 데리고 이민선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가 하와이로 올 때는 자기 이름을 Ye Chung Doo로 하였는데 하와이로 이주한 후 Lee Chung Doo로 표기했다. 하와이 이주 당시에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거의 Ye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힐로 한인감리교회
이정두가 하와이에 온 후 농장 노동자로 살았을 것인데 언제 힐로로 이주한 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1920년 이전에 이주하였을 것이고,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고 본다. 1919년에는 김이제 목사가 본 교회에 파송받았다.
이정두는 하와이로 이주한 지 15년이 되고, 56세가 되던 192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5차 하와이 연회에서 하와이섬 힐로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Chung Do Lee로 표기된 것은 오타일 것이다. 그해 파송된 목사는 이관묵이었고, 그는 힐로 한인교회뿐만 아니라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까지 맡은 순회 목사였으며, 장로 목사 곧 정회원이 된 지 5년이 된 목사였다. 그리고 그해 파송된 전도사는 없었고, 파송된 권사는 그뿐이었다. 그러므로 이관묵 목사가 순회 목사였으므로 이정두가 권사이긴 했지만, 힐로 한인감리교회 사역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파송된 그달에 보고된 두 한인교회의 현황은 아래와 같았다. 세례 교인 2명, 어린이 세례 교인 3명, 입교 교인 4명, 학습 교인 7명이었다. 주일 학교에는 7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고 등록된 학생은 42명이었다. 웹워스 청년회에는 고등부가 10명, 중등부가 9명이 등록했다. 그리고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5달러를 하였고,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64달러를 헌금하였다.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1,900달러에 해당하는 예배당이 있었고, 건물 유지비로 23달러를 썼다. 위의 교인 현황에서 따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힐로 한인감리교회 교인수가 더 많았을 것이다.
이후 1927년까지 이정두의 이름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가 1927년까지 계속 권사로 파송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2월의 제23차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이정두는 심상헌과 함께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이관묵 목사의 지도하에 사역하였다. 그런데 1928년 2월의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하와이 선교연회의 ‘내지선교/교회확장부의 부장인 일본인 T. 고무로 목사는 하와이섬 힐로에 거주하는 힐로 한인감리교회가 신축 예배당 건축의 필요성이 상당히 많았다고 보고했는데, 신축 예배당이 필요하기로는 가와이섬의 긱가하 필리핀 교회와 같은 형편이었다. 그런데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예배당과 사택을 그해에 건축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본 교회 예배당 건물과 예배당 터는 24,000달러에 해당했고, 사택과 사택 터가 8,500달러에 해당했다.
1928년 2월 보고와 이정두가 1년 동안 사역한 1929년 2월의 보고를 비교할 때 힐로 한인감리교회의 형편은 아래와 같았다. 예배를 드린 곳은 세 곳으로 같았고, 한 명이 줄어 전도사가 2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동일하게 없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은 2명이 늘어 19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은 3명이 늘어 78명, 학습 교인이 64명이 줄어 19명이었는데 이 중 18명이 지난 1년 동안에 학습을 받았다. 그런데 힐로에 거주하지 않은 교인이 3명이 늘어 15명이었고, 거주하는 교인은 27명이 늘어 101명이었다. 지난 해와는 달리 교인 2명이 별세했다. 주일 학교는 한 곳이 줄어 세 곳에서 운영되었고, 동일하게 19명의 직원과 교사가 있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20명이 늘어 320명이었고, 매주 평균 출석한 자는 10명이 늘어 290명이었고, 주일 학교를 위해 123달러가 늘어 310달러를 후원했다. 엡워스 고등부 학생은 2명이 줄어 53명이었지만, 엡워스 중등부 학생은 하나도 없었는데 26명이 되었다.
2년에 걸쳐 하와이 연회가 1년에 본 교회에 240달러를 후원하였다. 교회 비용으로 17달러가 적은 180달러를 사용했으며, 세계봉사헌금으로 동일하게 150달러를 헌금했고, 작년에 없었던 240달러를 선교사 보조회에 헌금했다.
이정두는 김붕서와 심상헌과 함께 1929년 3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 제24차 회의에서 힐로 감리교회 전도사로 재차 파송을 받았다. 그해 힐로 지방 순회 목사는 작년에 이어 이관묵이었다. 1929년 2월 보고와 이정두가 1년 동안 사역한 1930년 2월의 보고를 비교할 때 힐로 한인감리교회의 형편은 아래와 같았다. 예배를 드린 곳은 세 곳으로 같았고, 한 명이 늘어 전도사가 3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동일하게 없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은 5명이 줄어 14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은 12명이 늘어 90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75명이 늘어 94명이었는데 이 중 31명이 지난 1년 동안에 학습을 받았다. 그런데 힐로에 거주하는 교인은 24명이 줄어 76명이었다. 주일 학교는 1곳이 줄어 2곳에서 운영되었고, 10명이 줄어 9명의 직원과 교사가 있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135명이 줄어 185명이었고, 매주 평균 출석한 자는 165명이 줄어 125명이었고, 주일학교를 위해 258달러가 줄어 달러를 후원했다. 엡워스 고등부 학생은 26명이 줄어 27명이었지만, 엡워스 중등부 학생은 12명이 줄어 14명이 되었다.
2년에 걸쳐 하와이 연회가 1년에 본 교회에 240달러를 후원하였다. 교회 비용으로 60달러가 적은 180달러를 사용했으며, 세계봉사헌금으로 동일하게 150달러를 헌금했고, 사택 임대료로 270달러를 지불했고, 연금과 구제비로 11달러를 지급했고, 선교사 보조비로 510달러를 헌금했다.
1930년 2월에 모인 제25차 하와이 연회에 보고된 힐로 한인감리교회 현황에 전도사가 3명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정두의 이름이 적시되지 않아 그가 전도사직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30년이면 그가 66세이므로 전도사로 사역하기에는 나이가 많기도 하다. 그런데 1931년 이후에도 3명의 전도사가 파송되었지만, 그의 이름이 없다. 그는 1920년 이후 1929년까지 9년간 권사와 전도사로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구두제조업에 관여하면서 이정두는 힐로에서 호놀룰루로 이주한 것 같다. 호놀룰루에 이주한 후 그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본 교회는 오늘날 그리스도 한인연합감리교회다.
이정두는 수십 년을 호놀룰루에서 구두제업사를 열고 종업원을 두고 관리하면서 생활했다. 그는 1960년 4월 16일에 9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오아후섬의 호놀룰루에 있는 누아누 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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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