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한길수(韓吉洙)는 1900년 5월 31일에 한국 황해도 장단에서 출생했다고도 하고, 개성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다섯 살 때인 1906년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는 미국인에게 케네스 (Kenneth)로 통했고 영어로는 Kilsoo Kenneth Haan으로 썼다. 10살 때부터 와이파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다가 그는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중앙학원에서 공부했고, 17살 때 카리히와이나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호놀룰루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농장 청부업자로 일했다. 그 후 그는 하와이 방위군에 입대하여 유창한 영어 실력을 키웠고, 영어 속어와 미국인의 견해를 배웠다.
이규연과 전경준이 주선하여 구세군 대령 칵스 부인의 후원으로 1912년 10월에 호놀룰루 구꾸이 스트릿에 있는 건물을 임대하여서 한인 구세군 영문이 설립되어 전도하였고, 성령학교를 세워 고아 양육과 국어 교육을 노력하였다. 한길수는 이 영문에 다녔고, 구세군의 창시자였던 윌리엄 부스 장군에게서 깨끗한 영적 습관과 정밀한 노역이 하늘과 사회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하와이 구세군 영문
한길수는 호놀룰루 구세군 영문에서 사역하였는데 1920년 8월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후 구세군 대표로 가와이섬으로 파송받았다. 이후 6년간 구세군 정위로 재직하면서 그는 구세군 목회자로 하와이 각지에서 활동했다.
한인 구세군과 미국 구세군 본영 대표와 구세군과 일본인의 구세군과 기타 구세군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925년 2월 25일부터 3월 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구세군 대회가 개최하였다. 한길수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신한민보는 1925년 2월 19일에 ‘구세군인이 내미 기근 구제’라는 제하에서 구세군 영문의 내지 기근을 위한 활동을 소개했고, 그달 26일에는 ‘기근구제금을 다수 부송’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기근 구제금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이후 구제와 관련하여 잡음이 있었던 모양인데 신한민보 4월 9일 자에 ‘구세군 정위 한길수씨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게재되었다. “경제자 귀보 3월 5일 (911호)에 하와이 통신에 ‘구제사업에도 화합이 못되어’ 제목하에 민단과 구세군에 불평이 생겼다 함은 오전된 것이외다. 당초에 내지 기근 구제금 모집에 대하여 민단 당국과 구세군 간부 간에 상의하여 구세군에서는 1만 한인에게 의복과 식물을 모집하며 한인 구세군 교인에게도 재정까지 직접 수봉하기로 결정하여 원만한 효과를 있었던 바라. 구세군 영문에서 구제금 기부한 사람들의 씨명과 금액을 국민보에 광포하였사오며, 일반 출연인의 씨명을 각별이 광포키로 소책자 5백 벌을 국민보사 인쇄소에서 인쇄하여 분급하였고, 인쇄비 7달러로 말하면 아직까지 지출한 것도 아니외다. 국민보사 인쇄소에서 인쇄인이 소책자 인쇄에 대하여 얼마의 시간과 공역을 들이든지 그의 일공만 주면 지묵은 신문사에서 대여키로 작정한 것이외다. 기근 구제금 모집에 대하여 하와이 한인 사회는 동족 상애하는 뜻으로 단결하여 한인교민 총단, 미국 감리교회, 기독교, 구세군, 성공회, 부인 구제회, 적십자회, 남녀청년회 등이 대표가 합석 의논하여 아무 충절 없이 구제금과 구제품을 수합하여 부송하였으며, 2월 13일 이후에 본 구세군에 들어온 백미 2표와 밀가루 9표는 기왕 상약한 대로 고국 기근 구제연합회에 넘기어서 호의 조치하였다. 구제 사업에 이와 같이 화합하기로는 근년에 처음 된 일인데 이같이 와전됨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대한민국 7년 3월 21일 호항 한인 구세군 정위 한길수”
석 달 뒤 6월에 한국에서 온 한국기독교 청년회 총무 신흥우, 조선일보 기자 김양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연희전문학교 학감 유옥겸 그리고 교육가 김종철 등 한국대표원을 위하여 하와이 각 한인 단체장으로 구성된 한인위원회가 연합환영회를 누아누 기독청년회관에서 열었다. 위의 한인위원회에 한길수는 구세군 대표로 참가하였고, 그 외 양유찬, 조광원, 김영기, 김리제, 정원명, 신홍균, 안원규, 이원순, 필지성, 민찬호, 김찬제, 이태성이 함께 했다. 환영회 외에 특별 연합예배를 드렸는데 이 예배에서 한길수는 환영사를 담당했다.
이듬해인 1926년에 한길수는 스텔라 윤과 호놀룰루에서 결혼하였는데 아내의 신앙을 좇아 그는 구세군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6년간 하와이 구세군 영문을 섬겼다.
구세군 목회자로 하와이 각지에서 활동
일본 진주만 공습 경고 서신 미국정부에 전달
나라 사랑
여러 해 전에 나누어졌던 감리교회 교인과 한인기독교회 교인이 처음으로 연합예배와 소창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8월에 왯기기 공원에 300여 명이 모였는데 이날 순서를 한길수가 맡았다. 한인기독교회 이용직 목사가 기도하였고, 감리교회 변홍규 목사가 설교하였으며, 미주에 갔다 온 강영각이 청년 운동에 대하여 연설하였고, 이어서 소창이 있었다.
석 달 후 만주사변이 일어난 가운데 1931년 11월에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에 정두옥이 설립한 국민회 선전부가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게재했을 때 회장 정두옥, 한국부위원 승용환, 원동부위원 김현구와 함께 구미부 위원으로 한길수가 소개되었다.
2년 후인 1933년에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워싱턴 대표가 되어 조선 민족 혁명당의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였다. 1935년에 중한민중동맹 하와이지부를 창설한 그는 1938년에 워싱턴 주재 대표가 되었다.
1939년 2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국회의 초청을 받은 한길수는 일본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여러 차례 경고하는 서신을 미국 연방정부와 미국 의회에 보내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세계대전 중 재미 한인들이 재미 일본인들이 격리된 콜로라도 수용소에서 일본인으로 분류되었을 때 그는 대한민국 국적과 재산을 되찾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1944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도로 행렬이 있었을 때 그가 디자인한 형상물이 선을 보였다. 그는 ‘한국을 위한 승리가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라는 글을 크게 보이도록 했다.
광복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등 한국 정치에 관여하다가 한국 정부 수립 후 도미하여 1956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가주 산호제에서 춘킹 회사를 세웠다가 1969년에 은퇴한 후 가주 산타크루즈 인근의 작은 해변 도시인 카피토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1976년 7월 1일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가 되었으나 한길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일본 양국을 위한 이중 첩자로 활동한 것이 문제 되어 서훈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damien.sohn@gmail.com
05.1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