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기순(金基淳)은 1869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그는 가족을 한국에 두고 적지 않은 나이인 41살이 되던 1910년에 단신으로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그는 하와이섬 하갈나우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이곳에 있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김기순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높이 사서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를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는데 이때 그는 처음으로 하와이 한인 선교에 발을 디뎠다. 그해 본 교회 순회 전도 목사로 박KH가 파송 받았고, 김기순과 함께 이완구도 권사로 파송 받았다.
이듬해 3월에 개최한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기순을 위와 같은 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그런데 1년 후인 1920년 2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 자료에는 100주년 헌금으로 5달러를 헌금했다는 것 이외에는 본 교회의 통계가 전혀 적혀 있지 않아 김기순의 첫 선교활동의 결과가 저조했음을 알게 된다. 윌리엄 푸라이 감리사는 그의 한인 사역 보고에서 한인 사역이 성장하지 않은 주된 난관은 한인들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화목하게 지내는 능력이 없음에 있다고 꼬집으면서 하와이 선교연회가 재정적으로 많이 후원하면서 한인 사역에 관해서 많이 생각했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가 거의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원인은 김기순의 교회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1920년에도 제15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힐로 교회와 하갈라우 교회에 이관묵 목사를 순회 전도목사로 파송하면서, 김기순을 본 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1년 후에도 김기순은 이관묵 목사와 함께 본 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1921년 하와이 선교연회 후에 김기순이 오아후섬 와히아와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설교 목사이자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푸라이 감리사는 이듬해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기순이 지난 1년 동안 믿음직스럽게 성공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다고 치하했는데 1922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에서도 볼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2명이 성인 세례를 받았고, 4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사람이 19명이었고, 등록한 학습 교인이 19명이었으며, 등록한 세례교인이 10여 명이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35명이었으나 평균 23명이 출석하였으며, 엡윗 청년회 고등부에 18명이 등록하였고, 엡윗 청년회 중등부에 3명이 등록하였다. 교인들이 1년간 97달러를 헌금했고, 100주년 헌금으로 90달러를 상회에 보냈다.
1922년에도 김기순은 본 교회 설교 목사 겸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에 마흔네 살 된 아내와 네 살 된 딸을 초청하여 한국에서 하와이로 이주시켜 가정을 이룬 결과 교회는 지난해보다 월등하게 성장했다. 1923년 초까지 1년 동안 7명이 성인 세례를 받았고, 6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자 33명이 입교를 받았고, 45명이 학습을 받았다. 주일학교에 9명이 등록하여 모두 출석하였고 한 해 헌금한 헌금은 110달러였다. 그런데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50달러를 상회로 보내 지난 해 보다 적었다.
1923년 2월에 개최한 제18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김기순을 본 교회 설교 목사이자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이듬해 2월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푸라이 감리사는 김기순이 와히아와 교회에서 정규 목사의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위의 보고에 따르면 호놀룰루 제일교회의 교육 목사인 황사용을 순회 전도목사로 본 교회와 와일누아 교회로 파송하였고, 김기순 외에도 한 명 더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위의 통계 보고에는 1년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가 목회자 사례비로 30달러를 보조하였고, 4명에게 성인 세례를 베풀었고, 21명에게 어린이 세례를 주었으며, 등록한 학습 교인은 4명이었고, 주일학교에 3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고, 37명이 등록하였는데 평균 28명이 출석하였다. 한 해 동안 교인이 437달러를 헌금하였고,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50달러를 상회에 보냈다. 특별히 2,000달러 상당의 예배당이 있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는 푸라이 감리사가 치하하였듯이 김기순의 탁월한 사역을 반증한다.
김기순은 1924년 2월에도 황사용 목사를 보조하는 설교 목사 겸 지방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황 목사는 본 교회뿐만 아니라 와일누아와 가후구에 있는 교회에도 파송 받은 이른바 순회 전도목사였다. 그해에 동지회 회원들이 한인감리교회를 떠나 따로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여 분열의 아픔을 겪었는데 한인감리교회는 ‘아래 교회’로, 한인기독교회는 ‘윗 교회’로 불렀다. 그러나 이듬해 4월의 하와이선교연회 보고서에서 약진을 볼 수 있다. 하와이 선교연회가 목회자 사례비로 작년보다 약 3배가 되는 84달러를 보조했고, 성인 세례자는 없었지만, 9명에게 어린이 세례를 주었고,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자는 30명이나 되었다. 61명이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등록한 세례 교인은 44명이었다. 주일학교에 45명이 등록하였는데 평균 37명이 출석하여 작년에 비해 10명 정도 많은 수치였고, 한 해 동안 7달러를 주일학교에 보조하였는데 이는 작년에는 없었던 재정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이 한 해 동안 163달러를 헌금하여 작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50달러를 상회로 보내 작년과 같았다.
1925년 4월에 모인 제20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기순을 작년과 같이 황사용 순회 전도목사를 보조하는 설교 목사 겸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해에 김기순은 호놀룰루에 거주하던 인사들이 조직한 임시정부 후원회 창립인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회장에 정원명, 서기에 강영호, 회계에 함잠여였고, 회원은 그를 포함하여 65명이었다. 위의 후원회는 신한민보에 “정부 후원에 뜻을 같이하며 힘을 합하실 동포는 우선 인구세 1원을 호항 우함 2117호 정원명 씨 처로 보내시옵소서. 대한민국 7년 4월 1일 임시정부 후원회 창립인”이라고 게재했다.
1926년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는 지난 1년간의 와히아와 교회의 통계를 발표했다. 작년처럼 성인 세례자는 없었으나 작년보다 2.5배가 많은 22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자가 작년과 같은 30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습 교인이 작년보다 6명이 적은 55명이었고, 등록한 세례교인은 작년보다 26명이 많은 70명이었다. 작년보다 15명이 적은 30명의 학생이 교회학교에 등록하여 평균 24명이 출석했고, 교사와 직원은 총 2명이었으며, 1년간 사용한 경비는 작년과 같은 7달러였다. 지난 1년간 교인이 작년의 3배 이상인 520달러를 헌금했고,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50달러를 상회로 보냈다. 안타깝게도 2명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작년과 같이 황사용 순회 전도목사를 파송하면서 김기수와 다른 한 사람을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다.
1927년 하와이 선교연회는 와히아와 교회에 황사용 목사 대신에 안창호 목사를 파송하면서 김기순을 설교 목사 명단에 올리고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으며, 지방 전도사 한 명을 추가 파송했다. 이듬해 2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에서 목회자 사례비 보조로 600달러를 지급하여 특이했고, 어린이 세례자로 입교한 자가 69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습 교인이 76명이었고, 세례 교인 89명이 등록하였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60명이었는데 평균 45명이 출석하였고, 주일학교에 15달러를 지급하여 지난해보다 성장했다.
1928년 2월에 회집한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기순을 설교 목사 명단에서 삭제하였지만, 와히아와 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다. 작년과 같이 안창호를 목사로 파송하면서, 지방 전도사로 고선순도 파송하였다. 1929년에는 약 300명의 한인이 와히아와에 거주했고, 하와이에서 유일하게 한인 지역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해와 이듬해에도 김기순이 와히아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이른바 평신도 전도사로 파송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신한민보는 1930년 7월에 ‘김기순씨 환갑잔치의 성황’이라는 제하에서 “와히아와 미감리교회의 기둥이시며 모든 고공한 가업에 많은 노력을 하시는 김기순 선생의 환갑 시기를 이용하여 동 지방 친구들은 7월 27일에 성대한 잔치를 배설한 가운데 200여 명 동포가 참석하여 선생을 위하는 축하식을 거행하였는데 꽃과 예물 속에 묻힌 김 노인은 기쁨이 홍안에 가득하였더라.”라고 게재했다.
1931년 2월에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 베커 박사의 사회로 성만찬을 한 후 필리핀 목사 7명, 일본인 목사 7명, 백인 목사 2명 총 27명과 기타 목사 부인들과 청년 대표들과 내빈 60여 명이 모여 감리사와 목사와 위원의 보고가 있고 나서 조사 위원을 선정하였으며, 장로와 집사의 안수례가 있었고, 연합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감독이 목사의 파송을 전과 같이 파송하여 김기순이 와히아와 한인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3월에 와히아와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고, 그날 저녁에 농촌 학생회 주최로 와히아와 한인 감리교회에서 200여 명이 모여 특별순서를 진행하였다. 그달 8일에 와히아와 공동회는 한인기독교회에서 모여 김기순을 포함하여 신임 이사부 7인을 선택하였고, 작년부터 시작한 독립저축금은 계속하기로 하였으며, 연전에 청년 구락당 시설하기로 거둔 나머지 390달러는 두 국어학교에 지원하기로 하였다.
오랫동안 한인 교인이 적립한 1,000달러와 하와이 선교연회가 지원한 3,000달러로 총 4,000달러를 들여 64자x44자 크기의 예배당과 주일학교 교실과 한글학교 교실을 각각 지어 1932년 2월에 헌당 예배를 드렸다. 김기순은 100달러를 건축 헌금했다.
그해 5월에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후 상해 임시정부를 더욱 돕기 위해 한인 감리교회에서 40명이 모여 현 순 목사의 상해 진상을 들은 후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사원 7인을 선정하여 재정 모집 등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이사장으로 김기순이 선정되어 1년에 1달러의 인구세로 큰일을 할 수 없으므로 12달러 이상 회비를 내기로 결의하고, 김기순은 대부분 회원과 같이 12달러를 내기로 작정했고, 24달러나 36달러를 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임시정부가 한양으로 옮기게 되는 날까지 우리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실행하기로 일동 박수한 후 폐회했다.
1932년에서 1936년 사이에 교인 8가정이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 중에 지방 전도사로 사역했던 고선순과 함께 김기순도 있었다. 귀국한 후 김기순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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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