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관묵(李觀黙)은 1883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하였고 그의 아내 이창순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므로 당시로는 엘리트에 속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가와이섬 막가웰리 농장으로 이동하였다. 1906년 6월에 송 건, 홍종표, 이형기, 고석주와 함께 그는 배운 사람 답게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자강회를 결성하여 한인 2세의 미래를 준비했다.
이관묵의 선교 사역은 1909년 3월에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이제 목사가 파송된 가와이섬의 긱가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면서다. 그는 이듬해 3월에 위의 교회 권사와 호놀룰루 펀치볼 길에 있던 한인소년학교 교사로도 파송되었다. 교장은 하와이 선교연회의 존 와드만 감리사의 아내인 메이미 H. 와드만 부인이었고, 교감은 한인 프랭크 L. 이였으며 교사로는 민찬호도 있었다. 이듬해에도 한CM과 최KM과 함께 이관묵은 교사로 파송되어 기숙사 사감을 겸임했으며, 민찬호 목사가 파송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도 파송받았다.
1912년에 이관묵은 2년째 지방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하와이 선교연회 교육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고, 2년 후에도 한인소년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1915년에 오아후섬의 가이우구와 와일누아에 있는 한인감리교회에 파송을 받았고, 이듬해 2월까지 한 해 동안 성인 1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어린이 13명에게 어린이 세례를 주었고, 12명의 어린이가 훈련받아 입교하여 1916년 2월에 84명의 성인 세례교인과 9명의 학습교인이 있었으며, 엡윗 청년회에 15명이 등록하였고, 주일학교는 한 곳에만 있었는데 직원과 교사가 6명에 등록한 학생은 30여 명이었으며, 예배당이 세 곳에 있었고, 이들은 1,400달러에 해당했다.
이관묵은 1916년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목사 시험에서 70점을 맞아서 집사 목사로 안수받고 호놀룰루 한인소년학교 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2년 뒤 3월에 모인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그는 A.W. 레오나르드 감독으로 부터 박새환, 카메노수키 타나가와 함께 장로 목사로 안수받아 정회원이 되었다.
힐로 한인감리교회
1919년에 이관묵은 하와이섬 힐로 구역으로 파송 받아 힐로에 거주하면서 힐로 인근 한인감리교회를 섬겼고, 하와이 선교연회가 한국어로 발행하던 한인교회보 힐로 지사도 맡게 되었다. 1921년에는 힐로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를 맡아 섬기다가 2년 뒤에는 힐로 한인감리교회와 가마구아 한인감리교회를 맡아 섬겼다.
1925년에 힐로 한인감리교회는 한국에서 기근으로 고생하는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평양 남산현 교회의 오기선 목사에게 일화 200원을 보냈고, 그해 7월에 본 교회 청년회가 서재필 박사와 함께 유억겸과 김양수를 초대하여 서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이관묵에게 사례비로 240달러를 보조했고, 힐로 구역에 두 명의 지역전도사를 파송했다. 1929년에 세계적인 공황과 이로 인한 실직이 하와이에도 불어 닥쳤으나 교인들의 경건 생활과 성수 주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소망하며 기도했던 대로 하와이 선교연회의 2,500달러 보조에 힘입어 온 교인이 정성을 다해 1930년 5월에 예배당을 준공하고 그달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헌당식을 거행했다.
1933년에 이관묵이 새롭게 교회 방향을 도모하였는데 한인 목사들 사이에 불온한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감리사 푸라이 박사가 순행 길에 본 교회를 방문하여 대부분 교인이 이관묵의 목회를 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목사와 교인이 영적으로 합력하여 교회를 섬길 것을 당부하였다. 그해 5월은 매우 바빴다. 엡윗 청년회가 회장에 김세라, 전도국에 김양수, 인제국에 최순이, 학문국에 김순이, 교제국에 김순복, 통신국에 이원태, 회계국에 한도원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프라이 감리사가 방문하여 설교한 후 계삭회를 개최하여 전도사에 심상헌, 김붕서 그리고 김묘연, 권사에 김창운, 주일학교장 대리에 김순복, 청년회장에 김세라, 유사에 피흥선과 이정근, 탁사에 전익서, 고성화, 김원섭 그리고 오영식, 속장에 안선도와 김베드로를 임명했고, 수입은 308.77달러였고, 지출은 301.71달러였으며 잔액은 7.6달러라는 재정 보고를 받은 후 이관묵이 프라이 감리사를 모시고 학갈나우 한인감리교회에 갔다. 감리사가 설교하고 성만찬을 인도한 후 계삭회를 개최하여 전도사에 장영환과 전세욱, 권사에 유춘엽, 주일학교장 겸 속장에 이옥산, 유사에 김신우, 탁사에 최봉탁, 임성만 그리고 황수경을 임명하고, 청년회장 최의선과 재정 잔액 8.20달러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달 31일에 김베드로의 사회로 졸업생 축하식이 본 예배당에서 있었는데 초/중학교 졸업생 여러 명에게 화환을 목에 걸어 축하하였고, 다과회도 열었다.
1934년 2월에 교회와 부인회 주최로 이관묵 목사 15주년 사역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교회는 이관묵 내외에게 화환을 걸어 환영하고, 김붕서 전도사의 환영사에 이어서 이관묵의 답사가 있었다. 그달 말에 이관묵은 주일학교 임원과 청년회 임원과 찬송대원을 소집하여 새해를 맞아 박민숙, 김세라, 김수복 그리고 박스텔나를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하고 청년회도 더욱 힘을 다하여 교회를 돕기로 하며, 찬송대의 조직을 개편하여 주장에 박민숙과 심나득을 선임하고 대원 14명도 임명하였다. 3월 첫 주일 저녁에 엡윗 청년회가 모여 회장에 김순복, 전도국장에 최순이, 인제국장에 김마리아, 학문국장에 김세라, 통신국장에 최의성, 교제국장에 박스텔나 그리고 회계국장에 김순이를 선출했다. 그달 셋째 주일에는 이관묵의 사회로 임원회를 열어 전과같이 자급하기로 하고, 각 임원이 자주 교우를 심방하여 더욱 친선을 돈독히 하여서 교회를 부흥시키기로 하였다. 그달 마지막 주일에 교인과 주일학교 학생 등 80여 명이 해변에 나가 야외예배를 드린 후 각각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여러 가지 유희와 해수욕을 하고 오후 3시에 마쳤다. 그해 8월 첫 주일 저녁에 푸라이 감리사가 방문하여 설교한 후 이관묵과 함께 성만찬을 인도하였고, 감리사가 계삭회를 열어 유사 피흥선의 보고를 받았는데 수입은 117.4달러였고, 지출은 108.54달러여서 잔액은 8.50달러였고, 주일학교장 김세라와 청년회장 김순복을 계삭회 회원으로 허입하였다. 그달 20일 저녁 7시 반에 찬란하게 단장한 본 예배당에서 이관묵의 주례로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본 교회 전도사 심상헌의 아들 라득과 한장순의 딸 텔마가 풍금 소리에 따라 입장하여 결혼식이 있었고, 예식을 마친 후 친교실에 모여 예비한 다과를 나누었다.
그해 이관묵이 섬기는 힐로 구역의 학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4월 1일에 부활주일을 맞아 교인 일동이 힐로 해변에 나가서 10시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준비한 오찬을 나눈 뒤 놀다가 저녁에야 교회로 돌아갔다. 그해 8월 첫 주일에 프라이 감리사가 학갈나우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에서 설교하였고, 이시화의 11번째 자녀인 경필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성찬식을 인도하였고, 계삭회를 열고 전도사 주원여와 속장 최의순을 임명했다.
1935년에는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김붕서를 전도사로 파송하고, 학갈나우 한인감리교회에 책임 전도사로 전세욱을 파송했다. 그해 3월 주일 아침 예배에서 이관묵의 주례로 피봉순과 피흥선의 딸 피옥년, 심나득의 아들 영일, 김피터의 딸 나오미, 김병철의 아들 상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달 22일에 내선 총무 콜스탯 박사가 방문하여 자신이 건축에 힘쓴 예배당을 들러보고 사진을 찍은 후 이관묵, 김세라, 김수복과 함께 화산의 각처 경치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해 9월에 임진호의 셋째 딸 은숙이 호놀룰루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그곳 김신일 집에서 하숙하였다. 2개월 뒤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임두화 목사가 방문하여 그를 앞세워 이관묵이 힐로 교회와 학갈나우 교회로 인도하였고, 임 목사가 은혜로운 말씀으로 교인들을 위로하였다. 그달에 학갈나우에 거주하는 차윤명과 최매리가 결혼하였으며, 치과의사 김영수는 득녀하였고, 산모와 유아는 건강하여 큰 기쁨이었다.
라나이 한인감리교회
내분으로 1936년에 힐로 한인감리교회 교인이 양분되어 목회가 어려워져서 이듬해 이관묵은 라나이 한인감리교회로 전임했다. 1941년에 입원하였다가 수혈한 후 차도가 있어 그해 9월에 퇴원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달에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에서 사역하던 아펜젤러 박사가 방문하여 환영회를 열었는데 한국어로 한국에서 겪은 경험담을 소개하여 100여 명의 교인이 기뻐하였고, 이후 사택에서 교회 직원과 함께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나누며 담화하였다. 다음날 주일예배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한 아펜젤러의 설교를 듣고 교인 130여 명이 크게 은혜를 받았으며, 찬양대에서 박사에게 화환을 걸어드렸고, 이날 오후에 부인보조회 주최로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환영 만찬회도 있었는데 크게 수고하였다 하여 이삼롱이 10달러를, 이진호와 최삼조가 각각 5달러를 부인 보조회에 기부했다. 다음 달 초에 이시화의 삼남 경호와 유헬렌의 결혼식을 주례한 후 몸이 좋지 않아 이관묵은 휴가차 와히아와에 거주하는 친구를 방문하였다가 주일 아침 예배에 안창호가 섬기는 와히아와 교회를 방문하고 요한복음 3:16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했다. 그해 추수감사주일은 성대했다. 준비한 각색 과일과 떡과 교인들의 헌금을 강단에 진열한 가운데 남녀 학생들이 찬송과 시편 낭독을 하였으며 이관묵은 ‘미포에 거주하는 우리는 특별감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예배한 후에 부인들이 준비한 야찬을 온 교인이 나누며 담소했다. 1942년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한 보고에 따르면 어린이 세례교인이 45명이었고, 성인 세례교인이 47명이었다.
아내 이상순이 1943년 6월 16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심적으로 위축된 가운데 병세가 발전하여 그해 8월에 병원에 입원하였고, 아내의 소천 3개월이 되던 9월 11일에 6명의 자녀를 이 땅에 남겨 둔 채 환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0월 17일에 하와이 선교연회 주최로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푸라이 감리사는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고, 하와이 선교연회에 주신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잃었다고 애석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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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