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송치순은 1864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40세가 되던 1904년 8월에 35세의 아내 방영순과 11살의 아들 자승과 4살과 1살 된 두 딸 마리아와 유순과 함께 일본에서 시베리아 선박에 승선하여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오아후섬의 와히아와 농장으로 이동하였다. 한국에서 감리교회 교인이었던 그는 한인 노동자 44명과 함께 1907년 9월에 한인 어린이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케인 스트리트 길에 세운 배영 의숙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이듬 해 3월에 레후아 스트리트 길에 있던 와히아와 초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1909년에 한인들이 식산흥업회사를 조직하여 수천 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융자를 통해 자영업을 장려하였다. 한인들이 코나에서 커피콩 농사를 하였고, 호놀룰루에서 사탕수수 농사도 할 수 있었으나 융자할 만한 담보가 없어 본 회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와이파후나 와일누아에서 노동할 기회를 찾아 들락날락하였으므로 와히아와 한인회 임원이 자주 바뀌었는데 그해 10월에 와히아와 지방 한인회 재무로 송치순이 선정되었고, 그 외 임원으로는 회장에 김형기, 부회장에 김치덕, 총무에 김몽령, 서기 겸 학교 담당에 한영식, 복지 담당에 송기해, 대의원에 강하운과 문봉현이었다.
딸 신애가 출생한 이듬해인 1910년에 송치순은 이정진, 김규붕, 강순종, 고병호, 원세봉 등과 함께 호놀룰루에 학교를 건축하고 남녀 동포의 교육을 발달하게 할 목적으로 취지서를 발표하였는데 경비는 15세 이상 남자는 한 달에 15센트를, 여자는 성혼 이후로 한 달에 10센트를 기부하여 재정이 확립된 뒤에 실시할 예정이었다.
1913년에 국민보 편집인이 와히아와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도전하여 시간제로 농장에서 노동하는 것보다는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에서 일본인들이 딸기 농사를 하는 것처럼 새로운 농사를 일구도록 도전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와히아와의 제7 사탕수수 농장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는 일거리가 부족했고 음료수도 부족하여 와히아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이 그나마 일거리가 있어 와히아와로 모여들었다.
1908년 3월 한인교회를 개척…1910년 호놀룰루 학교 건축
1915년 제10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선교 동참
1917년 와히아와 교회 지방 전도사 파송
1933년 3월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전도사 파송
와히아와 한인교회
1912년 11월에 송치순이 신한민보를 위하여 50센트를 기부하였다. 그와 함께 기부한 와히아와 거주민은 김의준, 장낙환, 한일성, 박종수, 안교점, 임두옥, 손순달, 양호민, 김성각, 이순흥, 이창아, 이준익, 최준화, 문상현, 박윤택, 문봉현, 신치봉, 김시호, 황용익, 김원삼, 정운서, 홍성범, 한창규, 이기선, 조치삼, 송기흥, 서기춘, 김윤종, 양응환, 성봉준, 권성건, 김기정, 강화서, 김하용, 전학준, 조항구, 홍천성, 이춘화, 김용서, 김만수, 차제홍, 류덕초, 박정보, 김경순, 석화선, 양주원, 조병기, 이진필, 이성인, 김국경, 한치운이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본 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송치순이 1909년에 와히아와 한인교회의 속회 인도자로 임명받아 한 해 동안 봉사하였는데 1915년에 개최한 제10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송치순을 와히아와 한인교회 권사로 파송하여 그가 처음으로 하와이 선교연회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의 사역 1년 후인 1916년 2월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한 해 동안 11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았고, 7명의 어린이가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18명의 어린이 세례자가 입교하였고, 15명이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여 총 45명의 학습 교인과 115명의 입교인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와 직원이 3명인데 등록한 학생은 35명이었고, 엡윗 청년회 고등부에 25명이 등록했다.
이듬해인 1916년 2월에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해 오아후섬에는 와히아와를 포함하여 10 지역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와히아와 한인교회에 6명을 파송했다. 에와 지역 순행 전도목사로 파송 받은 임준호와 지방 전도사로 파송된 서진수와 더불어 송치순은 정운수, 남덕도, 곽종태와 함께 권사로 다시 파송되었다.
1917년에 모인 제12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송치순을 권사가 아니라 임준호와 안양칠과 함께 와히아와 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고, 정운수를 권사로 파송했다. 1918년에는 파송을 받지 않았으나, 1919년에 임준호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파송 받으면서 송치순은 정임수와 함께 지방 전도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고, 그해 남덕두와 김유걸이 권사로 파송 받았다. 1920년에도 송치순은 장유수와 김기수와 더불어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고, 남덕두와 김유걸이 권사로 파송 받았다. 3년 뒤인 1923년 11월에 송치순의 딸이 꽃다운 쌍둥이 딸을 낳아 그와 온 교회가 기뻐했다.
1920년에 건축한 담임목사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7년 3월에 유명한 사업가이자 부유한 부동산 업자였던 퍼시 M. 폰드가 와히아와 한인교회에 기증한 올리브 애비뉴 길에 있는 토지에서 1923년에 2,000달러의 공사비로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해 7월에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일동이 찬미하고, 임준호 목사가 기도한 후 송치순 전도사가 취지를 설명하였다. 강영각이 음악을 연주하고, 황사용 목사가 설교한 후 찬미대가 찬송가를 부르고, 현 순 목사가 설교하고, 찬미대가 다시 찬송가를 부르고, 김또라가 독창에 이어 헌금하였고, 김이제 목사가 축도한 후 폐회하였다.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24년에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 회원이 따로 나가 한인기독교회를 개척하였다. 본 교회는 1962년에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로 변신하여 오늘날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송치순은 1926년에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유니온 석유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이즈음부터 그가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한 것으로 본다. 그가 1933년 3월에 하와이 연회로부터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 받았다. 그해 8월에 임두화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본 교회에서 안원규의 사회로 신임 목사 환영회가 있었다. 송치순이 기도를 담당한 후 권도인의 환영사와 임두화의 취임사 그리고 하와이 선교연회 윌리엄 푸라이 감리사의 답사로 이어졌다. 신임 목사 환영회가 있은 다음 날 부인회 주최로 신임 목사 환영만찬회가 있었다. 박금우 회장의 사회로 황마리아가 기도하고 식사한 후 최또라의 독창에 이어 신임 목사의 감사 말씀이 있은 뒤 송치순이 정원명과 안원규와 함께 환영사와 답사를 하였다. 부임한 후 첫 수요 예배를 인도한 신임 목사는 본 교회 임원회를 소집하고 재정 유사 두 사람을 선정했다. 그달에 송치순의 차남이자 하와이 대학 3학년인 아더가 그 대학교회 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송만수와 같이 중국의 상해 대학으로 향하게 되어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신임 목사 부임에 이어서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1934년 1월에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인 푸라이 박사가 본 교회를 방문하여 계삭회를 소집했다. 임두화 목사가 교회 각 기관의 발전을 보고한 뒤 새해 시무할 직원을 결정하였다. 송치순은 지역 전도사로 파송되었고, 그 외 직원으로 박종수와 김이제는 본처 목사로, 정의조, 문또라와 안정송도 지역 전도사로, 이승무, 황혜수, 박영준과 임정열은 권사로, 김신경, 송정윤, 이헬렌, 홍숙자, 김신일, 박에스더, 이정선, 권희경과 유진학은 속장으로, 정원명, 안원규, 문또라, 정의조와 편성원은 탁사로, 조제언, 박종수, 송정윤, 권도인, 안원규, 문또라, 황사근, 홍숙자, 남마태, 정의조와 최또라는 유사로, 정의조는 주일학교장으로, 고복성은 엡윗 청년회장으로, 임정령은 부인보조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2월 말 저녁에 송구영신회로 많은 교인이 모여 간단하게 기도회를 한 후 대화와 오락 등으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에 신년을 맞이했다.
1935년 정월 첫 주일은 가정 주일이었다. 세상 풍파를 떨어버리고 교회로 온 교인의 가정이 많아 수백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그날에 21가정이 본 교회에 다시 등록하였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호놀룰루 제일한인교회에 박종수를 담임목사로 파송하였고, 송치순을 황혜수, 안정송, 임정렬, 문또라와 함께 전도사로 파송하였으며, 이승무와 송정윤을 권사로 파송하였고, 그달에 푸라이 감리사가 계삭회를 소집하여 유진학, 김신일, 이금우, 조영신. 이해련, 김신경, 한형신을 속장으로, 박종수, 권도인, 조제언, 문또라, 황사근, 안원규, 남마태, 이정주, 권희경, 홍숙자, 정의조를 유사로, 정원명, 안원규, 박관두, 편성원, 조제언, 정의조를 탁사로, 정의조를 주일학교장으로 선임하고, 박관후를 엡윗 쳥년회장으로, 임정렬을 부인보조회장으로 소개하였다. 그달에 송치순의 손자이자 송진구의 아들인 송호성이 중앙초등중학교에 재학하였는데 안타깝게도 1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족과 교회는 큰 슬픔에 빠졌다.
그해 2월에 부인 보조회 주최로 부인간친회가 있었는데 토요일 저녁에 60여 명이 모여 10시에야 끝났다. 다음 달에 예배당 안벽에 풀내스트봇을 붙여 페인트를 칠하였고, 전등을 새로 달았으며, 외벽은 두 번 페인트를 칠하였고, 지붕을 고치고 검은 칠을 하여 수리를 마쳤으며, 사교실의 마루와 벽을 칠하였고, 하와이 선교연회 푸라이 감리사가 접는 의자 70개를 후원하여 친교실에 두었다. 신축이나 다름없었는데 하와이 선교연회가 900달러를 지원하고 본 교회가 100달러를 헌금하여 1,000달러가 소요됐다.
가후꾸 농장에서 다년간 노동하던 우달수가 연로하여 병세가 잦음으로 작년에 그 농장에서 본 교회 구제회로 연락하여 호놀룰루로 이동하였는데 기력이 양호하여 간혹 쉬운 일도 하며 주일예배와 삼일예배를 출석하고 특별헌금이나 통상 경비를 위하여 힘에 넘치게 헌금을 많이 하여 교인들이 그의 성의에 감사했다.
감리사 푸라이 박사 내외가 준비한 만찬을 가진 후 그해 11월에 계삭회가 있었다. 중요 직원보고 후에 내년도 직원을 선정했다. 송치순은 황혜수와 안시택과 함께 지역 전도사로 파송 받았고, 권사에 이승무와 송정윤이, 탁사에 이정근, 정의조, 편성운, 안원규와 정원명, 유사에 박종수, 조제은, 안원규, 이정두, 남마태, 황사근, 권도인, 장형신, 심영신과 최혜림, 주일학교장에 남마태가 선임되었고, 엡윗 청년회장 고복성과 부인보조회장 심영신을 소개했다.
1937년 이후 송치순이 지방 전도사로 파송받았다는 기록이 없고, 그 후 그의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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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