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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조한식 (186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식 (趙漢植)은 1864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그는 황해도 해주군에서 거주했는데 아내를 여윈 후 혼란스러운 가운데 황성신문 등을 통해 하와이 농업 이주를 접했다. 신체가 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면 일자리를 얻기가 쉽고, 열흘에 15달러를 지급하면 당시 한화로 57원이었는데 하루 10시간을 노동해도 당시 노동자의 일당에 비하면 높았고, 일요일에는 휴식할 수 있었다. 돌아올 기약 없는 외국 생활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겠지만, 누구든지 일신이나 가족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고자 하는 자에게 편리를 주선하고, 학교 설립법이 관대하여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됨에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1904년에 홀아비가 된 그는 아홉 살 된 아들 원섭을 데리고 하와이 농업 이민을 시도했다. 40세의 그는 아들을 데리고 콥틱 기선에 승선하여 그해 6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조한식은 하와이섬의 파할나라고도 하는 가우 파할나에 이주하였고, 이곳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파할나에 이주한 지 5년이 되던 1909년 3월에 호놀룰루 감리교회에서 제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이 연회에 조한식이 출석하여 지방 전도사 고시에서 88.25점을 받아 통과했다. 그 외에도 조연택과 이선일 등도 비슷한 점수를 받아 고시에서 합격했다. 조한식은 이 연회에서 하와이섬에 있는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이 연회는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에 김윤K를,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양행Y과 김광H를 파송했다. 그해 보고된 바로는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는 학습 교인이 15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이 11명이었고, 주일학교가 2 곳에 있었으며, 교직원이 7명이었고, 22명이 등록하였으며, 1년 헌금액이 14달러였고, 교회 건물은 없었다. 그리고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는 학습교인이 12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이 15명이었고, 주일학교가 1곳에 있었으며 5명의 교직원에 13명의 학생이 등록했으며, 1년 헌금액이 16달러였고, 교회 건물이 없었다.

이듬해 3월에 모인 제5차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조한식이 지난 1년간 사역한 보고는 작년에 비하면 저조와 성장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는 저조했는데 학습 교인이 3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이 3명이었고, 주일학교가 1곳에 있었으며, 교직원이 2명이었고, 4명이 등록하였으며, 1년 헌금액이 5달러였고, 교회 건물은 없었다. 그러나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는 성장했는데 학습 교인이 36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이 25명이었고, 주일학교가 2곳에 있었고 75명의 학생이 등록했으며, 1년 헌금액이 15달러였고, 교회 건물이 없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어린이 세례와 성인 세례를 받은 사람이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으나,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서는 각각 1명과 8명이었다. 위의 보고에서 기대할 수 있듯이 하와이 선교연회 존 W. 와드만 감리사는 파할나 한인감리교회가 특별히 믿음이 강하므로 예배당을 신축하길 소망했고, 이는 파할라에는 박KH가 운영하는 한국학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 선교연회에서 조한식은 지방 전도사 고시에서 고시에 임한 9명 중 박세환과 함께 최고 점수로 90점을 맞아 지방 전도사 2년차에 들어갔다. 그해에도 그는 작년과 같이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이 연회에서 작년과는 달리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에는 권사를 파송하지 않았으나, 작년과 같이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김광H을 파송하였으나 박기H도 파송했다. 

그해 5월에 하와이에서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그달 25일에 발행된 신한민보는 ‘우등에 뽑힌 국문풍월’이라는 제하에서 글 제목 ‘바람’에서 우등한 자를 소개했다. 1등 한 명은 호항밀쓰학교 학생 정영수, 2등 두 명은 파할나 거주 배일진과 호항밀쓰학교 학생 김호연, 3등 네 명은 호항밀쓰학교 학생 박봉렬, 막가월니 거주 이군실, 파할나 거주 박기홍, 리휘 거주 김양식, 4등 8명은 고나 거주 강영소, 리휘 거주 이 수, 막가윌리 거주 황령하, 호항한인학교 학생 임학봉, 파할나 거주 박주범, 호항 가와이아 학교 학생 강실와, 막가월리 지아 거주 이복녀 그리고 파할나 거주 조한식이었다. 위의 신문에 게재한 조한식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쏘이세벗님네야 굳새게점점불어 오는곳을알겠다 끝이없시달아나 구름좇는기운과 우리나라곧가서 남계우는소리가 태극기를날려라.” 그의 시에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독립을 읽을 수 있다.

1911년 1월에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에서 개최하였고, 조한식이 이 선교 연회에 출석했다.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사역했던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에 대한 보고가 없었지만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대한 보고는 있었는데 작년에 비해 절반으로 저조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어린이 세례와 성인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각각 3명과 1명이었고, 그해 1월에 학습 교인이 15명이었으며, 입교 교인이 12명이었고, 주일학교가 1곳에 있었으며, 교직원 7명에 20명의 학생이 등록하였고, 1년 헌금액이 15달러였다. 작년의 기대와는 달리 교회 건물을 짓지 못했다. 이러한 저조에는 한인 노동자의 이동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한식은 작년에 이어 호누아포 한인감리교회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의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 연회에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김채나S를 권사로 파송했고, 박KH가 파할라 한국 학교로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한인이민사를 연구하는 이덕희 선생은 조한식이 사역했던 하와이섬의 파할라 한인감리교회도 2000년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우스 코나와 노스 코나 한인감리교회

 

이듬해인 1915년에 모인 제10회 미국 북감리교 제10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조한식을 하와이섬의 훅기나에 있던 사우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와 홀누알누에 있던 노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의 지방 전도사로 임명하였고, G. 모토가와와 홍한식과 함께 해외선교 위원회 위원과 리온 L. 루프부로와 C. 마카무라와 함께 성수주일 위원회의 위원으로도 선임하였다. 

1916년 2월에 있었던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 첫째 날에 박SC, 박KH, 한명교 등에 이어서 조한식이 사우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와 노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에 대한 사역 보고를 하였다. 지난 1년 동안 두 교회에 각각 주일학교가 있었고, 총 3명의 직원과 교사가 있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17명이었으며, 성인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3명의 어린이가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자가 18명이었고, 지난 1년 동안 14명이 학습 교인이 되어 총 14명이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등록한 입교 교인은 총 23명이었으며, 연료와 전기 등 지출한 금액은 총 29달러였다.

둘째 날에 조한식은 지역 전도사의 과정을 완전히 이수하여 집사 목사 곧 준회원으로 선임되어 그날 오후 회무를 마치면서 조한식은 축도 순서를 맡는 영광을 누렸다. 넷째 날 오후 2시에 안수식이 있었다. 감독은 먼저 어린이 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어서 정회원(장로 목사)이 안수 위원으로 참가하여 홍한식에게 장로 목사로 안수한 후 이관묵, 박새환, 김재성, 가메노수키 다나가, 요시미 미우라, 코르넬로 라미레즈와 함께 감독이 조한식에게 집사 목사(준회원)로 안수했다. 

그리고 위의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조한식은 G. 모토가와와 홍한식과 함께 해외선교 위원회 회원으로서 해외선교 보고를 아래와 같이 하였다. ‘한인 교인이 모국 교회에 후원금을 보냈는데 그들이 자신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이름을 언급할 수 없으나, 서울에서 사역하는 D.A. 벙커 선교사가 포화한인교보를 통해 호소하여 코할나와 하갈나우 등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는 많은 한인 교인이 서울의 가심 지역에서 사역하는 목사에게 80달러를 보조하기로 하고 그 대부분은 지난 한 해 동안에 지급하였다.’ 

그리고 리온 L. 루프부로와 C. 마카무라와 함께 성수주일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조한식은 성수주일 위원회 보고도 다음과 같이 하였다. ‘기독교인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함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안식일에 다른 종교를 믿는 자와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에게 전도하고 있다. 부모와 목회자는 자녀에게 주일은 가장 좋은 날이므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책을 읽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안식일이 평일과는 달리 가장 매력적이고 영적인 날이 되도록 도와주어 자녀가 주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모가 주님의 집으로 가자고 권하면 기쁘게 따라나서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뜰에 있는 한 날이 다른 천날 보다 더 좋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해도 조한식은 하와이섬의 노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와 사우스 코나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고, 성수주일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17년 6월에 하와이 이민에 따라나선 아들 원섭이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그런데 그의 결혼 서류에 어머니가 한국인으로 임 씨라고 적혀 있음으로 1917년 이전에 조한식이 결혼한 것 같다. 

조한식은 1918년 3월에 개최한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참석하여 두 교회에 대하여 지난 한 해 동안의 사역 보고를 하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세례받은 성인과 어린이 세례를 받은 어린이가 각각 5명이었고, 지난 한 해 동안 어린이 세례를 받은 자로서 입교한 자와 학습을 받은 사람이 각각 7명이었다. 지난 2년 전에 성인 세례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5명이나 되었음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으나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자가 2년 전보다 11명이 적어서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 등록한 학습 교인이 24명이었고, 등록한 입교 교인이 20여 명이었고, 주일학교는 두 교회에 각각 있었고, 직원과 교사가 총 13명이어서 2년 전보다 10명이 많았고, 등록한 학생은 지난 2년 전보다 거의 두 배가 되는 총 32명이었다. 교인 훈련에 15달러를 지급했고, 기타 수십 달러를 냈다. 그는 그해에도 하와이섬의 노스 코나 한인감리교회와 사우스 코나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1919년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 보고서에는 통계 자료가 없어 그의 선교 업적을 찾을 수 없다.

1919년 제14회 하와이 선교 연회 이후 조한식의 이름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조사하여 1924년에 본국에 보고한 보고서에는 조한식이 마우이섬 프우네오(브네네?)에 있는 한인교회의 목사로 재임했다고 한다. 그 후 그에 대한 행적을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02.1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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