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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김재성 (188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재성은 1886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마지막에 거주했던 지역이 교동이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교동은 수원에 있고, 전국에 교동이 19곳에 있어 교동이 어딘지 확인할 방법은 쉽지 않아 보인다. 교동에 거주하던 김재성은 19세가 되던 1905년에 단신으로 고향의 형 뻘 되던 23세의 성태와 함께 하와이 노동 이민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해 3월에 그는 만추리아 기선을 타고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에서 Kim Chai Sung으로 통했다.

하와이에 거주한 지 4년이 되던 1909년 3월에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산하의 하와이 선교 연회 의 존 T. 존스 감독은 김재성을 하와이섬 하갈나우 지방의 권사로 임명하였다. 김재성이 이곳에서 노동자로 있었던 모양인데 권사로 파송받기는 처음이었다. 이해 하갈나우 지방에 파송된 최진태 목사는 이곳과 힐로와 올나까지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 김재성이 파송될 당시 본 교회에는 학습 교인이 4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6명이었다. 세례 교인 6명 중에는 김재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 교회 교회학교에 직원과 교사가 8명이었으며 학생은 21명이었고, 2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있었다. 김재성은 학습 교인과 세례 교인을 포함하여 원입 교인까지 심방하면서 권면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1910년 3월 보고에 따르면 어린이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인 11명에게 세례를 배풀 정도로 교회가 성장했는데 1년간 사역한 김재성의 신실한 권사 사역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1910년 3월에 하와이 선교 연회를 소집한 에드윈 H. 휴즈 감독은 박H준과 함께 김재성을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임명하였다. 그즈음에 그가 하와이섬 하갈나우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 같다. 그달에 홍치범이 스프렉클스빌 지역에 파송되었는데 그는 이곳뿐만 아니라 하나 지역과 키파훌루 지역까지 맡은 순회 전도 목사였다. 그달의 교세에 따르면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와 인근 교회에는 학습 교인 35명에 세례 교인이 36명이나 되고, 스프렉클스빌과 인근 지역에 교회학교가 3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9명에 학생은 70명이었으며, 엡워스 학생회에는 14명이 등록되었고, 750달러 시가의 예배당도 있었다. 그러나  사역한 지 1년 후에는 학습 교인이 19명에 세례 교인은 30명으로 축소되어 교세가 저조했다. 그런데 김재성이 파송된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가 스프렉클스빌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로 보이지만 정확한 통계를 찾을 수 없다.

1911년 1월에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하와이 선교 연회를 인도한 에드윈 H. 휴즈 감독은 교세가 약화된 상황에서도 김재성을 마우이섬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박H준과 함께 다시 파송하였다. 그런데 그달에 본 교회에 파송을 받은 한인 목사는 김재성이 하와이섬 하갈나우 지방의 권사로서 함께 협력했던 최진태였다. 그도 이 지역의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듬해 곧 1912년 초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 연회에서 윌리엄 해리스, 차윤종, 김광현, 최운숙, 김형근, 이관묵 그리고 박종수와 함께 김재성은 권사직에서 지방 전도사로 임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교회 성장과 관련 없이 김재성이 보여준 권사로서의 신실한 자세를 인정한 것 같다. 1913년 연회에서 홍치범 목사가 감리사를 대신하여 하와이 각 섬의 한인 감리교회 상황을 보고할 때 김재성은 동역했던 최 전도사가 별세하여 스프렉클스빌에 산재한 약18개의 한인감리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였다고 보고했다. 이후 1915년까지 하와이 선교 연회가  그를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 전도사로 사역한 지 4년이 되던 1916년 2월에 김재성은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의 감독이었던 윌슨 S. 루이스 목사에게서 안수받아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이 되었다. 이날 준회원이 된 목사는 7명이었는데 김재성 외에도 한국인으로 조한식, 이관묵, 박세환이 있었고, 외국인으로 요시미 미우라, 코르넬로 캔라스 라미레쯔 그리고 카메노수키 다나카가 있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달인 그해 3월에 김재성은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 본토로 이주한다. 그래서 그의 하와이 사역은 1909년부터 1916년까지 약 7년간 한인 노동자를 중심하였다.

1916년 3월에 김재성은 공부하기 위하여 김진형, 안득현, 김길석과 함께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학비를 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와 1918년에도 미국 캘리포니아 연회의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 4년차에 있으면서 하와이 선교연회에 소속했으나 미국 본토에 있었는데 그해 연회록에는 그가 가와이섬의 막가웰리와 골로아 지방의 한인 선교를 위하여 파송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1918년 초에 김재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고,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노동했을 것이다. 돈이 아쉬웠을 터인데 김재성은 그해 3월에 이경의의 병원비로 거금에 해당하는 1달러를 기부했다. 그해 가을에 그는 조득린과 함께 오늘날 바이올라 대학으로 알려진 로스앤젤레스 성경학원 성경과에 입학했다. 

김재성은 1919년에도 송헌주와 C.C. 라미레즈와 함께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의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 4년차에 있으면서 하와이 선교연회 회원이었는데 김재성은 선교지 임명 없이 유학하고 있다고 그해 연회록이 기록했다. 그와 함께 홍치범도 선교지 임명 없이 유학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공부하던 김재성은 그곳 한인들의 조국 광복 운동에 참여했고, 그해 6월에는 국민 의무금으로 국민회에 2달러 50센트를 냈다. 

1920년에 모인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는 김재성이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 4년 차에 있는 캘리포니아 연회 회원으로서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제일한인 감리교회 계삭회 회원으로 소개하면서 선교지 임명 없이 유학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해 3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70여 명의 한인이 모여 제1회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이날 김재성이 연설하여 그의 존재감을 알게 된다. 이날 순서는 아래와 같았다. 오전 10시에 홍치범의 개회로 제1부가 있었고, 제2부는 조성환의 개회로 애국가를 병창한 후 김진형이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고, 정해경 부인이 독창했으며, 최재덕이 ‘독립운동의 제2계급에 나온 우리’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후 박순애 부인이 독창했고, 이어서 김재성이 ‘기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어서 염세우, 김종혁, 박순애, 차정석이 차례로 연설하였다. 염세우의 인도로 기도하고 6시에 폐회한 후 만찬회가 있었다. 

1909년~1916년 한인 노동자 중심 하와이 사역

1905년 하와이 노동 이민자의 대열 합류

1909년 하와이섬 하갈나우 지방의 권사 임명

1912년 권사로서 신실한 자세 인정, 지방 전도사 임명

1916년 윌슨 S. 루이스 목사에게 안수받아 집사 목사

그해 12월에 김재성은 2년 만에 로스앤젤레스 성경학원 성경과를 졸업했다. 당시 학장은 어니스트 G. 마셀이었고, 부학장은 라이라 C. 넬저였으며, 1920년 겨울 학번 담임선생은 존 R. 트로프리지였다. 그와 함께 졸업한 ‘1920년 겨울 학번’은 그를 포함하여 17명이었고, 이 중 남학생은 6명이었고, 여학생은 11명이었으며, 아시안으로서는 그가 유일했다. 졸업 앨범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의 좌우명이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921년에도 김재성은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 4년 차에 있으면서 하와이 선교연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목회지 임명 없이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에서 유학차 비활동 교역자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재성이 학업이 아니라 사업을 한다고 보고하면서 캘리포니아 연회에 그의 회원권에 대한 처리를 요청했다. 

이듬해인 1922년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재성이 여러 해 동안 본 연회 산하의 어떤 선교 지역도 임명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 연회 회원권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본 연회는 D.H. 크라인펠터가 김재성에게 편지를 보내서 본 연회 회원으로 계속 있을 것인지를 질문하도록 요청했고, 이에 더하여 캘리포니아 연회가 그의 회원권에 관하여 직접 그에게 질의하도록 요청했다. 

그해 3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80여 명의 한인이 모여 제2회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제1부에 이어서 제2부인 저녁 예식에서 애국가를 제창한 후 김재성이 기도했다. 그 후 강영각의 나팔과 풍금 연주, 나성 구미위원부 보고 및 사건 처리, 강영각의 음악, 독립 원조와 본 지방에 거류하는 동포 전도에 대한 의견 진술, 원동 임시정부 광고, 서간도 참상에 대한 사건 처리, 애국가 및 만세 제창 후 폐회하고 다과를 나누었다. 

1924년 이후 미국 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회원 명단에서 김재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김재성의 이름을 신한민보에서 보게 된다. 1928년 4월에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이 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였는데 김찬일과 김배혁이 자기 사업을 뒤로하고 장례비를 관리하고 기타 모든 범절에 많은 수고를 하였다는 보도를 읽을 수 있다. 많은 한인이 부조한 가운데 1달러를 기부한 김재성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 있는 한국어 학교인 고려학원은 운영 기본금을 모금하기로 한 후 이듬해인 1929년 1월에 모금한 총액이 511달러 30센트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본금 보관 위원이었던 송태은과 김성수 그리고 오충국이 본 학원 기본금을 낸 이름과 금액을 광고하였는데 이 광고에서 김재성이 2달러를 기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전명운 의사의 부인이 별세했을 때 김재성이 50센트를 부조했음을 알게 된다. 김재성의 이름이 1928년 5월에서 멈춘 후 더 이상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1.2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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