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원명은 1881년 11월 20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정창규와 김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1888년부터 4년간 평양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상무방의 사환으로 2년간 있다가 1894년부터 과일 상점을 하였다. 1899년에 평양 숭실 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하면서 저녁에는 ‘면학회’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영어를 잘하는 그는 1902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섬기던 그레이함 리 선교사의 요리사로 들어가 1년간 일하면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1904년에 정원명은 하와이 노동 이민선 ‘차이나’를 타고 그해 2월 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에와 농장에서 그는 4년간 한인 노동자를 위하여 ‘통변’이 되어 영어 통역을 하면서 한인 노동자와 농장주 사이를 중재하고, 감독의 지시사항을 한인 노동자에게 알려주며, 캠프에 남은 사람을 점검하고,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등 한인 노동자의 어려움을 돌보아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에와 농장에서 노동하던 김익룡은 이만춘과 함께 정원명의 말에 감동하여 회개하게 되었다면서 표창하여달라는 편지를 공립신보에 보낼 정도였다.
정원명은 윤병구 등 통역인과 함께 하와이에 온 이듬해인 1905년 5월에 한인 노동자의 환난상휼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과 일화 배척을 위하여 에와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에 회장을 역임하면서 친목회보를 발행하였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에와 친목회를 중심으로 하와이 동포와 협력하여 동정금을 모금하여 지진으로 어려움을 당한 샌프란시스코 인근 한인 동포에게 27달러를 보냈고,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이른바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56달러 25센트를 모금하여 한국에 보내 국제 보상에 함께 했다.
1907년 6월에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조약을 강요하였으므로 그해 9월에 하와이에 나뉘었던 에와 친목회 등 24개 한인 단체가 ‘한인 합성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초대 총회장이었던 임정수가 사임하여 정원명이 취임하였다.
영어 통역을 하던 정원명은 1908년에 에와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이후 7년간 일했다. 이듬해 2월에 ‘한인 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조직하여 국민회 산하에 공립협회가 북미지방총회로 그리고 한인 합성협회가 하와이지방총회로 변신했는데 정원명은 하와이지방총회를 조직하고 그해 6월에 임원을 선정한 후 퇴임하고 에와 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대동보국회가 병합하여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가 되었다.
1910년 7월에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국권을 피탈 당하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각 지방 대표자를 소집하여 대동공진단을 조직할 때 정원명이 단장이 되어 대한 독립을 위해 군인을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8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중앙총회 대표원으로 선정되었고, 이듬해에도 연임했으며 1914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참의원 참의장을 지냈다.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선교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는 정원명을 오아후섬 에와 지역의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이날 임준호 목사도 작년에 이어 본 지역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이 되었다. 이달에 접수된 보고에 따르면 등록한 학습 교인은 4명이었고, 등록한 세례교인은 31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성인 5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7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자가 18명이었다. 주일학교는 하나가 있었는데 교직원이 5명이었고, 41명이 등록했으나 엡워스 청년회는 없었다. 1,2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있었는데 한 해 동안 연료와 전기 등에 지출한 비용이 135달러였다.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13차 하와이 선교 연회를 인도한 애드나 W. 레오나르드 감독은 송지S와 함께 정원명을 오아후섬 에와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했다. 그런데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의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2, 3년 전부터 권사로 파송을 받아 그의 신실성을 확증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원명 이외에도 이날 목사로 임준호를 파송했으며, 홍성모를 권사로 파송했다. 2년 전에 비해 여러 사람을 더 파송한 것으로 보아 에와 지역에 한인 노동자의 수가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달에 보고된 바로는 등록된 세례 교인이 2명이었고, 등록된 학습 교인이 2명이었으며, 성인 세례교인이 4명이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이 9명이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교인이 무려 36명이나 되었다. 주일학교에는 5명의 교직원과 40명이 등록했고, 엡워스 청년회에 16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은 2년 전과 같이 시가가 1,200달러로 여전했으나 1년 동안 헌금한 액수인 360달러는 적지 않았는데 이 중 훈련 헌금이 20달러였고, 그 외 헌금은 일반 헌금이었다.
한편 호놀룰루에서는 1914년 말 하와이 선교 연회 감리사와 한인 여자학원 원장이었던 이승만과의 선교 견해 차이가 실마리가 되어 교회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국민회에서 3,000여 달러로 매입한 토지를 한인여자학원에 기증하였는데 기증 과정에서 한인 사회에 물의와 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래서 하와이 선교 연회는 이승만을 한인기독교 교육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교회는 한국에서 부흥사로 잘 알려진 김유순 목사를 초빙하여 각 지역에서 10개월이나 부흥회를 인도하여 교회 화합을 노력했으나 교회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한인 노동자의 어려움을 돌보는 한인 사회 지도자
에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와 전도사 사역
호놀룰루 한인상업회 회장, 한인기독교청년회 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 회장
마침내 1918년 7월에 이승만과 그를 따르던 자들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를 떠나 따로 예배를 드렸는데 새로 세워진 교회라도 해서 ‘신립교회’라고 불렀다. 이 신립교회가 4개월 뒤인 그해 12월에는 ‘한인기독교회’로 정식 명칭을 표방하면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민찬호가 부임하였다. 이러한 분열로 말미암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큰 상처로 남았고, 이런 분열 양상은 하와이 5개 섬에 있는 한인 교회로 서서히 번져 나갔다.
하와이 선교 연회 감독이었던 매트 S. 휴즈 박사가 1919년 3월에 제14차 하와이 선교 연회를 소집했다. 휴즈 박사는 작년에 정원명을 에바 한인감리교회로 파송하였는데 작년과 달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로 파송하였다. 본 연회는 이날 방화중을 목사로 파송했으며, 이날 파송 받은 지방 전도사에는 안원규, 남새윤, 황계수가 더 있었다. 교회 분열 이후 3개월이 지났지만, 교회 분열의 여파로 인하여 정원명에게 교회 사역은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1920년 2월에 보고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세에 따르면 세례 교인이 3명, 어린이 세례 교인이 8명, 등록 교인이 되기 위하여 교육받은 어린이 세례 교인이 2명이었으며, 등록된 학습 교인이 약간 명이었고, 지난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학습 교인이 5명이었으므로 지난 1년간 교세가 상당히 약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려운 교회 상황에서 방화중이 목사직을 사임한 가운데 그 대신에 홍한식이 부임한 것으로 보고되어 그 어려움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주일학교에는 5명의 교직원에 60명이 등록하였고, 엡워스 청년회에는 중등부에 22명이 등록하였고, 고등부에 8명이 등록하여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젊은이로 인해 희망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달에 있은 연회에서 감리사를 대신하여 한인 교회를 보고한 다니엘 H. 클라인펠타 목사는 가까운 장래에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져 교회 사업이 증진되기를 기대하였다.
1920년 2월에 개최한 제15차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는 지방 전도사와 권사 파송 명단이 없어 정원명을 파송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고, 그 이후에도 파송 명단이 없어 정원명의 파송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1917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그의 파송을 확인할 수 없으나 전후를 살펴보면 그가 파송을 받았다고 보인다. 그래서 정원명이 1916년 2월 이후 1920년 2월까지 4년간 에와 한인감리교회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서 권사와 전도사로 사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16년 이전 2, 3년간 권사로 파송을 받아 그의 신실성을 확증한 후 전도사로서 파송하였다고 추증한다면 그의 사역은 6, 7년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1920년을 전후하여 가구업을 경영하던 정원명은 이전에 활동하였던 민족 사랑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해 그는 황사용 등과 대조선독립단의 중심이 된 국민 공동회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정원명은 호놀룰루에서 사업하던 한인 실업가들과 뜻을 같이하여 호놀룰루 한인상업회를 조직하였는데 1년 후인 1922년에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한인기독교청년회 회장을 맡았고, 그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학생기숙소가 설립되었을 때 안원규와 함께 이사부원으로 임명받았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에 1925년 1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정원명이 회장으로 선임되어 기관지 단산시보를 발행하여 후원에 박차를 가했다. 1928년 2월에 하와이 한인 지도자 29명이 모여 한족통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였을 때 정원명은 의사부 의원을 지냈다. 1930년에 하와이 한인협회 위원을 역임했고, 1934년에 대한인국민회와 대조선 독립단 합동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936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국민총회 참의원으로 활동했다.
정원명은 1942년 6월 23일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61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오아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14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정원명에게 그의 나라 사랑을 기려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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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