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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장용운(1880-?)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장용운(Chang Yong Woon)은 1880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그는 송창리에서 거주했다. 그런데 이 송창리가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구한말 유학생, 선비, 농부, 군인, 머슴, 역부, 건달 등으로 구성된 첫 하와이 노동 이민선 게릭이 1902년 12월에 하와이로 출발했고, 이듬해 1월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렇게 시작된 하와이 노동 이민선은 그 후 계속되었는데 장용운은 25세가 되던 1905년에 아내를 한국에 두고 홀로 하와이 노동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시베리아 선박을 타고 그해 5월 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장용운은 마우이섬 라하이나 지역에 있던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였던 것 같고, 라하이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농장지배인이었던 헨리 P. 발드윈은 한인 노동자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관대했고, 라하이나 한인 감리교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1842년에 마우이섬 라하이나에서 드와이트 발드윈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선교적인 마음으로 한인 노동자를 도왔고, 1911년에 그가 소천한 후 그를 기념한 H.P. 발드윈 기념교회가 세워졌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학교까지 있었다. 

장용운이 하와이에 온 지 약 3년이 되던 1908년 1월에 제3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였다.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은 데이비드 H. 무어 박사였고, 감리사는 존 W. 와드만 목사였다. 하와이 선교연회가 세워진 지 3년이었지만 한인 교역자의 연회 진출이 역력했다. 한인 총무에 홍치범 목사였고, 보조직으로 홍치범과 이지성이 있었으며, 준회원 과정에 있던 자로는 1년차에 신반석, 최진태, 김이제, 김유순이 있었고, 2년차에 민찬호, 윤병구, 이형C, 홍치범, 김유순이 있었다. 그리고 민찬호가 1903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의 보조로 출판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보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이내수가 출판을 책임졌다. 그뿐만 아니라 와드만 감리사 부인이 교장으로 있던 호놀룰루 한인 매일학교가 있었고, 메타 S. 맥 부인이 교장으로 있던 호놀룰루 한인 수잔나 웨슬리 홈과 훈련 학교가 있었다. 하와이 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38개에서 40개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는데, 한국의 평양대부흥 운동을 듣고 특별히 술꾼과 도박꾼과 아편쟁이가 예수께로 돌아와 새사람이 되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 이들 중 15개 한인감리교회는 부분적으로 자립하여 성장했다. 

위의 1908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장용운은 두 지역에 파송을 받았다. 첫 지역은 마우이섬의 라하이나, 하나 그리고 기파훌루 지역이다. 그는 이 세 지역에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그해 위의 세 지역에 대한 교세가 보고된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 한인 노동자가 거주하므로 처음으로 선교하려고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년 후 1909년 3월에 보고된 교세 통계에 이들 세 지역에 관한 보고가 없어 장용운의 1년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달에 누군가를 파송할 계획이 있어서 한인 선교를 기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장용운이 파송 받은 두 번째 지역은 아주 큰 사탕수수밭이 있던 스프렉클스빌이다. 그는 본 교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연회는 홍치범 목사를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하여 위의 스프렉클스빌지역과 하마구아보고지역을 순회 전도하도록 하였고, 그는 지난 4, 5년간 스프렉클스빌지역에 거주하면서 순회 전도에 임하였다. 다행히 이달에 보고된 위의 두 교회의 교세가 합쳐진 보고가 있지만 스프렉클스빌 교회의 교세를 확인할 수 없으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가 교세의 절대다수인 것 같다. 등록된 교인은 25명이었고, 이중 세례 교인이 9명이었으며, 나머지 16명이 학습 교인이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수는 9명이었는데 성인 세례 교인이 8명이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이 1명이었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는데 교직원이 4명이었고, 등록 학생은 30명이었다. 예배당 사용료로 지난 1년간 지급한 액수가 280달러였고, 지금까지 예배당 관계로 진 빚 50달러를 지난 한 해 동안 지급하였다. 그리고 지난 1년간 교인들이 예배당을 위하여 150달러를 헌금하였고, 위에서 언급한 이곳 H.P. 발드윈 농장지배인이 도움을 주어 조만간에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1909년 3월에 보고된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와 하마구아보고 한인감리교회가 합쳐진 교세 통계는 1년 전보다 두 배 반이나 증가했다. 등록 교인수는 64명으로 세례교인이 31명이었고, 나머지 33명은 학습 교인이었다. 세례받은 수는 24명이었는데 성인 세례 교인이 16명이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이 8명이었다. 주일학교가 하마구아보고 한인감리교회를 포함하여 두 곳이었는데 교직원이 9명이었고, 등록 학생은 50명이었고, 평균 출석이 40명이었다. 위의 수치의 대부분이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교세인 것 같다. 그해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하였는데 시가가 750달러였다.

1909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이었던 찰스 W. 스미스 박사는 장용운을 마우이섬 하나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그달에 하나 한인감리교회에 한인 목사를 파송하지 못했으나 마우이섬의 하나 지역과 라하이나지역과 기파훌루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 목사를 파송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의하였다. 그달에 접수된 교회 현황 보고에는 하나 한인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라하이나 지역과 기파훌루 지역에 관해서도 없었다. 그러므로 장용운과 순회 전도 목사를 보내어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노동자의 전도를 시도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09년 3월에 보고한 교세 통계에는 하나 한인감리교회 통계 보고가 없고, 단지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보고만 있는데 이 보고에 하나 한인감리교회 보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하나감리교회 통계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은 1910년 3월에 보고된 교세 통계에도 일어난다. 곧 하나 한인감리교회 보고가 따로 없어 장용운의 노력을 확인할 수가 없다. 

1910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에 장용운이 지방 전도사로 추천받아 교역자 평가부에서 시행한 시험을 치러 85점을 맞아 지방 전도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해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그해 감독이었던 에드윈 H. 휴즈 목사로부터 그가 하와이섬 부나지역의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 교회에 목사나 권사를 따로 파송하지 않았으나 아주 가까이에 있는 올라 지역에 파송된 홍한식 목사가 순회 전도 목사로서 부나 지역까지 섬겼던 것같으나 그가 하갈나우 지역과 힐로 지역까지 맡게 되어 있으나 부나 지역을 포함하지 않아 확증할 수 없다. 

 

1908년 하와이 선교연회 두 지역 파송

1909년 순회 전도 목사 파송 잠정적 결의

1910년 하와이섬 부나지역 지방 전도사 파송

1932년 하와이섬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교역자

1910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하갈나우 지역과 힐로 지역을 포함한 올라 지역 교세는 하와이섬에서 가장 컸다. 등록한 교인이 85명이었는데 세례교인이 42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43명이었다. 주일학교에는 6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66명이었는데 평균 53명이 출석했고,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23명이 등록했다. 그런데 이 교세에서 부나 지역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부나 지역은 극소수에 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1911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푸나 지역에 파송한 목사나 지방 전도사나 권사가 없었으므로 이 지역에서 노동하던 한인 노동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지역 선교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장용운이 1년차 지방 전도사 과정을 마치고 2년 차 지방 전도사 과정에 들어섰다. 그달에 그는 마우이섬 하나 지역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조연택 목사를 하나 지역과 더불어 기파훌루 지역까지 순회하며 전도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했으나 권사를 파송하지는 않았다. 

그달에 보고된 하나 지역 교세는 하나 지역과 기파훌루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 지역이 대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두 지역에 등록한 교인이 23명이었는데 세례교인이 11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12명이었다. 두 지역에 각각 주일학교가 있었고, 8명의 교직원이 있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25명이었다. 하나 지역에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가 있었고, 11명이 등록하였다. 내지선교비로 8달러, 주일학교비로 1달러 그리고 미국성서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여 총 10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이 금액은 거의 하나 지역에서 헌금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 지역에 예배당과 사택이 있었고, 시가는 각각 500달러와 250달러였다.

1912년부터 장용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다가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나타난다. 그해 감독은 윌슨 S. 루이스 목사였고,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다. 그리고 한인 총무는 김CH였고, 한인 통역인은 이승만이었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장용운을 마우이 하익구 지역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해 마우이섬에는 한인 감리교회가 두 곳에 더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3마일 떨어진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에 김이제가 파송되었고, 남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하나 한인감리교회에 최S은이 파송되었다. 그달에 보고된 교세 통계에는 하익구 지역이 보고되어 있지 않아 당시 교세를 확인할 수 없다.

1917년 이후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 지방 전도사나 권사가 기록되지 않다가 1932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 장용운이 하와이섬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교역자로 출석하였다. 1년 전에 그가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었을 것 같고, 순회 목사인 이관묵과 동역했다고 본다. 1년간 어린이 세례를 받은 자가 1명이었고, 성인 세례를 받은 자가 4명이었으며, 무려 76명이 등록하였으므로 장용운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해에 O.W. 용운이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가 아니면 권사로 파송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혹 장용운이 아닌가 싶다. 

장용운의 사역은 적어도 1908년부터 1916년까지와 1932년을 합하여 9년간 사역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1917년부터 1932년까지와 1933년 이후도 지방 전도사로 파송 받았다면 그의 선교 기간은 9년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damien.sohn@gmail.com

1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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