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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안원규(1877-194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안원규(安元奎)는 1877년 8월 30일에 서울에서 안문학과 정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889년 이후 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25세가 되던 1903년에 홀아비였던 그는 하와이 노동 이민 대열에 섰다. 두 번째 노동 이민 선박이었던 ‘콥틱’을 타고 그해 3월 3일에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오하우섬의 와이파후에서 노동하면서 그는 김이제가 목회하던 와이파후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1년간 농장 노동을 한 후 그는 그곳에서 잡화상을 하였다. 

을사늑약이 있던 이듬해인 1906년 3월에 안원규는 오하우섬의 와이파후에서 전도원, 정상교 등과 함께 공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포 간의 환난상구와 일화배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1907년에 공동회 등 하와이에 있던 20여 한인 단체가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여 국권 회복, 동포 환란 구제 그리고 교육 발달을 꾀할 때 안원규가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하와이 선교 연회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H. 무어 박사가 1908년 1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소집한 하와이 선교 연회는 안원규를 오아후섬의 와이파후 지역의 한인 선교를 위한 권사로 임명하였다. 이곳에 온 지 5년이 되던 때였다. 그가 파송을 받던 날 임정수를 이곳과 와히아와 지역의 순회 지역 전도사로 파송하면서 박충S도 권사로 파송하였다. 안원규가 임명될 당시 이 지역의 한인감리교회는 600달러 싯가의 예배당이 있는 큰 교회였다. 학습 교인이 69명이었으며, 세례 교인이 39명이었고, 지난 한 해 동안 8명의 어린이와 6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본 교회는 해외 선교비로 2달러와 내지 선교비로 10달러를 헌금하여 선교하는 교회였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이 기금으로 2달러, 교회 교육을 위하여 2달러, 미국 성서 공회에 1달러, 부인 내지 선교회에 2달러, 일반 연회헌금으로 2달러를 헌금하여 총 21달러를 헌금하였다. 1909년 3월까지 1년 동안 세례를 받은 8명이 안원규의 권사 사역의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그달에 보고된 바로는 지난 연회의 보고와 비교할 때 크게 줄어 학습 교인이 19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9명이어서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통일된 한인 단체 결성에 따른 여론으로 1909년 2월에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를 결합하여 국민회를 결성하였고, 그해 6월에 안원규가 국민회 아래 하와이지방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양복 재단을 배운 안원규는 호놀룰루에서 양복점을 운영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1910년 3월에 모인 제5회 하와이 연회에서 하와이 연회 감독이었던 에드윈 H. 휴즈 박사는 홍기H와 함께 안원규를 오아후섬의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임명하면서 안원규는 담임목사로 파송 받은 민찬호 목사와 협력하며 사역하게 되었다. 하와이 연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임명받은 해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등록한 42명의 학습 교인과 76명의 세례 교인 외에도 예배에 참석하는 원입 교인이 안원규의 목회 대상이 된다. 하와이에서 으뜸 되는 한인교회답게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는 교회 건물이 두 동이나 있었는데 6,300달러에 해당했고, 1,000달러의 시세인 사택도 있었다. 1년 동안 6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고, 12명이 성인 세례를 받아 성공적인 목회였지만, 교인 1명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슬픔은 오래갔다. 

국권 피탈이 되던 1910년에 하와이 지방 총회의 대표자들이 대동공진단을 조직할 때 안원규는 재무가 되어 국권 피탈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위의 휴즈 박사가 1911년 1월에 소집한 제6회 하와이 연회는 작년에 이어 안원규를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래서 이날 파송을 받은 민찬호 목사는 1906년 이후 본 교회를 목회하여 본 교회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작년과는 달리 권사가 안원규 혼자여서 바빴을 것이다. 그달에 보고한 바로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12명의 어린이 세례자와 86명의 성인 세례자가 있었는데 유동식 교수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85년사에서 그해 교인이 107명이라고 적고 있다. 

1913년 10월에 하와이 농상주식회사 사무원이 된 안원규는 이듬해인 1914년 2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농상부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4월에는 하와이 기독청년회 장재가 되어 회장 이승만을 보조했다. 그해 박종수 등과 함께 안원규는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여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연무부 사업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는데 후원했다. 

해마다 안원규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 선교 연회 감독이었던 윌슨 S. 루이스 목사가 1916년 2월에 제11회 하와이 연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맡았다. 이 연회에서도 안원규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날 그 외에도 조석진과 윤기상이 권사로 임명받았고, 목사로는 송헌주가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하와이 연회에 보고된 바로는 학습 교인이 85명이었으며, 세례 교인이 138명이었는데 비거주 교인이 22명이나 되었으며, 두 동의 건물이 있었고, 32,000달러의 시가를 기록했다. 그런데 예배당과 사택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6,922달러를 지급했으나 4,755달러의 빚이 있었다.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를 소집한 아드나 W. 레오나르드 감독은 1908년 이후 권사로 파송을 받았던 안원규를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지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날 목사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하던 방화중을 파송하였고, 지역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자는 그 외에도 남시Y (남세윤?)와 백낙M이 더 있었고, 한재명과 이태성과 연계송이 본 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많은 사역자를 파송한 데에는 1914년 말 이후로 조짐을 보여온 교회 분규가 현실화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존 W. 워드만 감리사 후임으로 하와이 선교 연회 감리사로 부임한 윌리엄 H. 프라이 감리사와 한인중앙학원 원장이었던 이승만과의 한인 선교에 관한 견해 차이로 시작된 갈등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각 섬에 있는 한인감리교회의 분열로 확산되었다.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만 하더라도 위에 소개한 유동식 교수는 1918년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이 171명이었다고 적고 있지만, 안원규가 지방 전도사로 파송 받던 그달에 보고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교인수는 위의 숫자에 훨씬 못 미친다. 보고에 따르면 성인  세례자수가 14명이었고, 어린이 세례자수가 17명이었으며, 25명이 어린이 세례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학습 교인수가 34명에 불과하여 모두 합해야 100명이 되지 못했다. 

교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한국에서 능력 있는 전도자로 알려진 김유순 목사를 초빙하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와 각 섬에 흩어진 한인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어 분열을 해결하고자 했다. 10개월간 노력한 김 목사는 한인들의 마음이 정치적인 충동에 이끌리어 있어서 부흥회를 더 계속해도 교회의 화합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하와이 선교 연회는 이승만을 하와이 지방의 교육부 책임자로 임명하여 화합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동서양의 사고방식에서 화합을 도출하기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해 7월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를 떠나 따로 예배를 드리던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이 그해 12월에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호놀룰루에는 두 한인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교회 분열이라는 난관을 직면한 가운데 최선을 다한다 해도 안원규의 사역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19년 3월에 소집된 제14회 하와이 선교 연회는 작년에 이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였고, 지방 전도사로 안원규를 비롯하여 남새윤, 정원명 그리고 황계수를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으며, 권사로 한재명, 이태성, 김주호 그리고 정운선을 권사로 파송하였다. 위의 유동식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1918년을 고비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수가 급속한 감퇴를 나타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하와이 선교연회는 2년 연속으로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고 지방 전도사와 권사를 한 명씩 더 파송하는 특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려운 교회에 부임한 방화중 목사가 갑자기 사임하게 되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후임을 찾아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안게 되었다. 큰 노력을 기울인 본 교회와 프라이 감리사는 한인 선교 사업에 실망하면서도 소망을 잊지 않았다. 안원규도 지방 전도사로서 자신의 소임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이화여전을 졸업한 이경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이듬해 192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5차 하와이 선교 연회를 인도한 A.W. 레오나르드 감독은 공석이었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황사용 목사를 파송하였다. 그런데 그해 연회록에 안원규를 파송했다는 기록이 없고, 1920년 이후 그의 파송 기록은 없다. 이로써 그는 1908년 이후 1920년까지 권사와 전도사로서 하와이 선교 연회의 파송으로 한인교회를 섬겼다고 보게 된다.

교회 사역과 함께 민족 운동을 병행하던 안원규는 이후 민족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해체된 이듬해인 1922년에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조직되어 부단장을 맡았다. 1933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다시 조직되었는데 1936년에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41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여 민족운동전선의 통일과 독립운동 강화를 노력하였다. 위의 해외한족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할 때 그가 호놀룰루에 설립된 의사부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가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고, 1945년 1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이듬해에도 연임되어 활동하였다. 

안원규는 호놀룰루 퀸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1947년 5월 22일에 향년 7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지 못하였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어 1995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12.0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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