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계신은 1868년 7월 3일에 한국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보다 약 3달 일찍이 태어난 고마리아와 결혼한 후 4자녀를 데리고 하와이 노동 이민 첫 배인 개릭에 올라 1903년 1월 13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가 1909년에는 오아후섬 에와에서 노동하고 있었다.
1909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4회 하와이 선교 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독은 찰스 W. 스미스 박사였고, 감리사는 존 W. 와드만이었다. 그리고 그해 한국인 총무는 홍치범이었고, 한국인으로 준회원 (집사 목사) 과정에 있던 사역자는 위의 홍치범 이외에도 민찬호, 이형C, 김유수, 신반석, 최진택, 김이제, 그리고 동명이인인 김유수가 더 있었다. 스미스 감독은 오응순을 오아후섬의 에와 지역과 와이아나에 지역의 순회 목사로 파송하면서 황계신을 오아후섬의 에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그달에 보고된 바로는 에와 한인감리교회에는 등록된 세례 교인은 24명이었고, 등록된 학습 교인은 38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어린이와 성인이 세례받은 수가 9명으로 동수였다. 주일학교에는 7명의 교직원에 65명이 등록했고 평균 60명이 출석했다. 1년간 25달러를 헌금하였는데 해외선교비로 3달러, 해외선교 주일학교비로 1달러, 내지선교비로 7달러, 내지선교 주일학교비로 3달러, 교회 일반 교육비로 1달러, 어린이 교육 기금으로 2달러, 교회 주일학교비로 4달러, 흑인보조회비로 1달러, 미국성경공회비로 1달러, 부인내지선교사회비로 2달러였다. 예배당은 시가가 1,500달러였다.
1년 후 1910년 3월에 보고에 따르면 등록된 세례교인이 16명이었고, 등록된 학습 교인이 24명이어서 1년 전에 비해 숫자가 감소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어린이가 세례를 받은 수는 9명이어서 1년 전과 숫자가 같으나 성인이 세례 받은 수는 1명이어서 1년 전에 비교해 숫자가 아주 적었다. 주일학교에는 3명의 교직원에 53명이 등록하여 평균 40명이 출석하였는데 이도 작년에 비해 적었다. 그러나 1년간 헌금한 액수는 25달러로 같았는데 해외선교비로 21달러, 교회 주일학교비로 1달러, 흑인보조회비로 1달러, 미국성경공회비로 1달러, 부인내지선교비로 1달러였다. 지난 한 해 동안 1,500달러의 시가인 예배당 수리비에 200달러를 지출했다.
1910년 3월에 개최한 제5회 하와이 선교 연회에서 에드윈 H. 휴즈 감독은 황계신을 오아후섬의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이달에 이KC를 오아후섬의 와일루아지역 뿐만 아니라 목골니아지역과 가후구지역과 아이아지역까지 담당하는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했다.
1910년 5월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와일루아 지역의 올드 밀 캠프에는 많은 한국인이 거주했다. 이기홍(41세), 이성목 (36세), 이수하 (43세), 김기림 (34세), 이채안 (31세), 이병원 (27세), 김상안 (28세), 이채경 (27세), 유봉천 (40세), 이오완 (32세), 김부일 (37세), 김원실(28세), 양임성 (29세), 최원경 (30세), 조채섬 (31세), 홍수잔나 (63세), 황윤명 (42세), 이춘경 (34세), 신백완 (30세), 김새곤 (30세), 김천살 (49세), 이순완 (49세), 이응찬 (34세), 이종임 (43세), 남창식 (42세), 이천완 (31세), 박광익 (35세), 송성화 956세), 조수홍 (35세), 이용보 (49세), 노상북 (35세), 김상운 (30세), 임태연 (26세), 신지봉 (28세), 신상오 (17세), 임창식 (62세), 김덕완 (36세), 유춘관 (40세), 채성주 (29세), 황인완 (31세), 박경일 (35세)은 총각이거나 홀아비였다. 김용식 (46세)과 부인 아그네스 (39세)와 송순, 유홍 가정, 김성진 (30세)과 부인 에바 (31세)와 운학 가정, 안경문 (41세)과 부인 파우실라 (41세)와 푸르다, 실라, 도럴 가정, 최진흥 (49세)와 부인 매틸다 (41세)와 한홍, 우홍, 호분, 히분 가정, 이종열 (34세)과 부인 도랄 (27세)와 수우 가정, 홍 호 (26세)와 아내 미수 (19세) 가정, 김사완 (46세)과 부인 보배 (24세)와 수연 가정, 박경호 (49세)와 부인 고손 (48세)과 범구, 공덕, 바덕 가정, 김순근 (42세)과 아내 매리 (36세)와 완성, 천성, 호성, 수성, 오성 가정이 있었다.
황계신이 파송 받을 당시 와일루아 지역과 다른 세 지역의 교회에 등록된 세례 교인수가 20명에 등록한 학습 교인수는 30명이었고, 등록하지 않았지만 성인 세례수는 5명이었고, 어린이 세례수는 4명이었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는데 3명의 교직원에 32명이 등록했고 평균 23명이 출석했다. 엡워스 청년회에는 고등부에 1명이 등록했고, 중등부에 10명이 등록했다. 6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있었다. 해외선교부에 20달러, 주일학교위원회에 1달러, 흑인보조회에 1달러를 헌금하여 총 12달러를 상회비로 지출하였다.
그런데 1911년 1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세는 작년에 비해 턱없이 격감되었는데 노동 조건에 따른 한인의 이동 때문으로 보인다. 와일루아 지역을 포함한 네 지역 교회에 등록된 세례 교인수는 19명이었고, 등록된 학습 교인수는 14명이었으며, 등록하지 않았으나 출석하는 세례 교인수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주일 학교에는 3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15명이 등록했다. 엡워스 청년회에는 고등부에 1명이 등록했고, 중등부에 8명이 등록하여 자녀를 둔 교인은 이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예배당 수리비로 62달러를 지급했다. 내지 선교부에 20달러, 주일학교위원회에 1달러, 흑인 보조회에 1달러 그리고 미국 성서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여 총 23달러를 상회비로 지출하여 두 배 정도로 헌금했다.
1911년 1월에 모인 제6회 하와이 선교 연회는 황계신을 오아후섬의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다시 파송했다. 그런데 이달에 위의 교회 목사로 홍치범 목사를 순회 목사로 파송하여 위의 교회뿐만 아니라 목골니아 지역도 맡겼다. 그런데 1912년의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1년간의 목회 결과를 볼 수 없어 안타깝다. 그뿐만 아니라 1913년 이후 1915년까지의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황계신의 파송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다.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1회 하와이 선교 연회를 소집한 윌슨 S. 루이스 감독은 황계신을 오아후섬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했다. 그래서 1915년 이전에 두세 번 권사로 파송하여 그의 신실함을 인정하여 하와이 선교 연회가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한 것으로 보이고, 1915년에는 그를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가 목골니아로 파송될 때 안최덕이 권사로 파송되었고, 홍치범 목사를 파송할 때처럼 와일루아 지역에 파송된 조연택 목사가 목골니아 지역까지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달에 보고된 보고서에는 목골니아 지역에 관한 보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 지역의 교세를 가름할 수 없다.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13회 하와이 선교 연회를 사회한 애드나 W. 레오나르드 감독에 의해 황계신은 최완S와 함께 오아후섬의 목골니아에 지방 전도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1917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황적으로 보아 1917년에도 이곳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 같다. 2년 전에 와일루아 지역에 파송된 조연택 목사가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 같고, 김임걸과 남덕도와 안채덕이 1918년 연회에서 권사로 파송되었다. 그런데 1918년 연회에 접수된 교세 현황에는 2년 전처럼 목골니아 지역에 대한 보고가 없어 교회 교세를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지역에 목사 한 명, 지방 전도사 1명 그리고 권사 3명을 파송할 정도로 한인 노동자가 많았고, 교인들도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14회 하와이 선교 연회가 1919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였다. 감독이었던 매트 S. 휴즈 박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총무 O.H. 워커 목사가 출석을 불렀다. 정회원 (장로 목사) 한인 목사는 조연택, 홍치범, 홍한식, 김이제, 이관묵, 이선일, 임준호가 있었고, 준회원 (집사 목사) 한인 목사는 김재성 그리고 송헌주가 있었으며, 준회원 과정 한인 목사는 안시흡과 박기홍이 있었다. 이날 한명교와 박종수와 방화중이 준회원으로 안수받았다. 이날 방화중이 오아후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은 가운데 황계신은 안원규, 남새윤 그리고 정원명과 함께 오아후섬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달에 접수된 보고서에는 권사 파송자가 없었으나 1920년 연회에 참석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였던 한재명, 이태성, 김주호 그리고 정운선이 1919년 연회가 파송한 권사로 보인다.
1914년 말 이후 하와이 선교 연회 플라이 감리사와 한인여자학원 교장이었던 이승만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있는 가운데 하와이 국민회에서 3,000여 달러에 매입한 땅을 한인여자학원 설립에 기증하는 과정에서 물의와 분쟁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1918년 7월에 이승만과 그를 따르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 중 얼마가 따로 예배를 드리다가 그해 12월에 한인기독교회가 되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분열되었다. 이듬해인 1919년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방화중 목사가 갑자기 사임하여 황사용 목사를 급속히 파송하는 등 교회 회복이 절실했다. 1920년 연회에 보고한 대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세는 급격하게 줄었다. 등록한 성인 세례수는 3명, 등록한 어린이 세례수는 8명, 어린이 세례자 중 입교인이 2명, 등록한 학습 교인이 약간 명, 지난 1년간 받은 학습 교인수가 5명이어서 전체 교인수가 30명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주일학교에는 5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60명이 등록하였고, 그리고 엡위스 청년회 고등부에 8명이, 중등부에 22명이 등록하였으므로 장래에 희망이 있었다.
1920년 이후 연회록에는 지방 전도사와 권사로 파송된 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황계신의 파송 여부를 단정할 수 없고, 기록된 목사 명단에도 황계신의 이름이 없다. 그러므로 황계신의 사역 기간이 1909년부터 적어도 1920년까지 11년간 권사와 지방 전도사로 사역하였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1934년에 동지회에 가입한 이후 그의 발자취는 공적인 한인 교계나 교포 사회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부인 고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년이 되던 1963년 11월 14일에 황계신은 호놀룰루에서 향년 9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부인이 안장된 인근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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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