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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함호용 (1868-195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함호용(咸鎬墉)은 1868년 6월 5일에 한국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880년에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최해나와 1897년 2월에 결혼하였다.  해나가 세례명이었으므로 최해나가 감리교회에 다녔을 것으로 보이고 함호용도 교인으로 보인다. 결혼 후 고덕에서 거주하였는데 서울 고덕동이나 평택 고덕동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하와이 노동 이민의 꿈을 가지고 제물포 내리감리교회의 도움을 얻어 1905년 5월에 제물포에서 일본 고베로 가서 몽골리아 기선을 타고 하와이로 출발하여 열흘 후인 그달 1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함호용 부부는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부네네 지방으로 이주하여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브네네 제일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이 교회는 스프렉클스빌 지방에 있던 한인감리교회의 기도처였다. 

홍치범이 마우이섬의 스프렉클스빌 지방과 와이루구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인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1906년 초 브네네 한인감리교회를 포함하여 이 지방에 있었던 여러 한인감리교회에 22명의 학습 교인과 11명의 세례 교인이 등록했고, 두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6명의 교직원이 있었으며 40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1907년 5월에 함호용은 한인들과 함께 부네네에 동명(東明)소학교를 설립하고 부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 수업했다. 스프렉스빌 한인감리교회 목사였던 김이제가 교장을 맡고 함호용은 서기로 재임하여 학교 운영과 학사 업무 전반을 관장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13개 모범 한글학교를 선정할 때 동명소학교가 선정되어 재정지원을 받았을 정도였는데 그후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진 가운데 1930년대에 폐교된 것 같다.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1905년에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면서 하와이에 ‘의성회’가 조직되었고, 김재규가 대표로 있던 ‘의성회’에 함호용이 가입한 것 같고, 1907년 9월에 하와이 한인 단체가 연합하여 합성협회가 조직될 때 함호용이 합성협회에 가입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에 합성협회가 미주 한인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국민회가 조직될 때 그가 합성협회의 후신인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0년 5월에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가 되었는데 1919년에 함호용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산하 마우이섬 부네네 지방총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12월에 25달러를 지급하고 대한민국 자유공채를 구매하였다. 그가 구매한 공채는 제1회 제4권 19호였다. 공채금 영수증에 하와이 지방 국민회 총재무인 김영우가 날인하였다.

적어도 1926년부터 하와이 선교연회는 함호용을 권사로 파송했을 것이다. 그래서 4년간의 신실한 권사직으로 그가 1930년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나타나기는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2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던 1929년 3월이었다. 본 연회는 그를 스프렉클스빌 지방 14곳에 흩어져 있던 한인감리교회 중 부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의 권사로 파송했다. 그달에 임준호 목사가 마우이섬 순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그들 외에 박기H, 강재우, 이환일, 문연찬, 김인경, 장용운 등이 본 지방에 파송되었는데 이들 중 5명은 지방 전도사였고 그 외는 권사였다. 브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가 스프렉클스빌 지방에서 교세가 가장 큰 교회로 보인다.

함호용이 권사로 파송되던 1929년 3월에 스프렉클스빌 지방의 모든 한인감리교회에 어린이 세례자가 59명이었고, 등록한 학습교인수가 94명이었는데 브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의 교세를 따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본 교회 교회학교에는 5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등록한 59명 학생이 평균 33명이 출석했다. 그리고 본 교회에는 예배당이 있었다.  

193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25회 하와이 선교 연회는 함호용을 스프렉클스빌 지방 부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달에 그들 외에 작년에 파송된 박기H, 강재우, 이환일, 문연찬, 김인경, 장용운 등을 파송하였는데 연회록에는 지방 전도사와 권사 등의 직함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프렉클스빌 지방에 10곳에 기도처가 있었고, 5명의 지방 전도사를 파송하였다고 했으므로 위의 파송된 이름 중 4명이 지방 전도사로 보인다. 그해 3월에 함호용은 지방 전도사 증서를 받았다. 증서에는 감리사였던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의 날인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1년이 지난 1931년 초에 하와이 선교 연회에 보고된 스프렉클스빌 지방 보고에 따르면 등록된 세례교인수는 45명이었고, 교적은 이곳에 두고 다른 곳에 거주하는 세례 교인이 한 명이었으며, 어린이 세례수는 5명이었다. 1년간 성인 5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87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2명이 세상을 떠났다. 두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3명의 교직원이 있었으며 132명이 등록하였는데 평균 32명이 출석했다. 지난 1년간 주일학교 비용으로 10달러를 지급하였고, 예배당 수리비로 1달러를 지급하였으며, 세계 봉사비로 10달러를 헌금하였고, 연금과 구제비로 1달러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스프렉클스빌 지방에 10개의 기도처가 있었으므로 브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의 통계를 따로 찾을 수는 없다.

 

함호용은 ‘성경연구의 진수’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수첩 크기의 용지로 72쪽이나 되었다. 이 글에서 그의 믿음을 살필 수 있다. 올리브 연합감리교회 100주년 역사를 쓴 안형주는 이 글에서 네 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님을 지칭할 때 ‘상제’와 ‘천부’를 자유롭게 사용했으나 가톨릭이 사용하는 ‘천주’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통적인 우주론적이고 도덕적인 방법으로 증명했다. 천부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이로써 그는 정신적인 환자라고 했다. 유교의 가치에서 죄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원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드리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점을 수긍하는 것이었다. 

1934년에 함호영은 마우이섬 브네네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받았다. 그해 가을에 차녀 점순이 호놀룰루에 있는 천주교 간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10월에 감독의 파송을 받은 워닝 목사 내외분과 윌리엄 H. 프라이 감리사가 주일 오후 3시에 부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여 원근 각처에서 온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임준호 목사의 사회로 환영회를 열었다. 위닝 목사는 ‘천연적 물질 증명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온 교우는 그의 간곡한 설교를 잘 들었다. 폐회 후 위닝 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례를 한 후 오후 5시에 목사실로 모여 만찬을 나누었다.

1943년 3월에 모인 제38회 하와이 선교 연회는 마우이섬에 거주하는 한인 노동자를 위하여 송체스터를 순회 목사로 파송하면서 함호용을 브네네 제일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1944년까지 1년 후 스프렉클스빌 지방에 등록된 교인은 23명이었고, 이 중 2명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1년간 사례비로 교회로부터 12달러를 받았다. 이듬해 2월 27일 주일 오후 2시 반에 마우이 선교 목사인 쇄웃 목사가 방문하여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로마서 6장 9절과 요한계시록 1장 18절을 봉독하고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날 참석한 온 교인들은 “신령의 재미를 많이 보고 산회하였다.” 

함호영은 1944년 3월에 개최한 제39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 지방의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브네네에서 거주하면서 순회 전도했다. 그가 파송 받은 그달에 12 한인감리교회가 있었고, 등록된 세례 교인은 23명이었다. 그해 11월 23일 주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어른과 학생들이 함께 예배당에 모여 찬송가 232장을 부른 후 함호용 전도사가 기도했다. 학생들이 찬송가 255장을 제창한 후 그가 감사절 역사를 소개했고, 함호용의 부인인 함해나와 그리고 문봉찬이 각각 기도한 후 교인 중에 감사절 강연을 맡았다. 다같이 찬송가 1장을 부른 후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은 각각 가지고 온 과실과 케이크와 소다 등을 배설하고 서로 나누며 “재미있게 지내고 산회하였다.”

함호용은 1954년 3월 27일에 향년 86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damien.sohn@gmail.com

10.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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