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혜수(黃惠受)는 1891년 10월 25일에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상단리에서 아버지 황개정과 어머니 김 씨의 4남 4녀 중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미국에서 목회자와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황사용과 황사선이 그녀의 오빠다. 그녀는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서울 연지동의 연동여학교를 졸업한 뒤 평북 선천의 표성 아카데미와 부산 초량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유학차 도미하였다.
오빠 황사용과 함께 황혜수는 1911년 6월에 상항에 도착하여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 같다. 동부로 이동한 이원익을 대신하여 미국 남감리교회가 운영하는 보육원의 한인 여학생 7, 8명을 위하여 몇 시간씩 조국 사정과 국어를 가르쳤다. 이듬해 2월에 나성 인근 엎랜드로 이주했다가 상항 밀스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 11월호 대도에 기고한 “대한 부인도 고등학문을 배울 일”이라는 아래의 글에서 황혜수의 여성에 대한 기독교 교육관을 엿보게 된다. “세월은 살과 같이 가고 흐르는 물과 같이 빨라 어언간 여름을 작별하고 가을을 당도하니 남산 초목은 단풍을 띄었고, 동원 금수는 깃을 찾아 돌아가는 것을 보매 자연히 동반구에 돌출한 반도가 심중에 생각나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살펴보니 15억 인생이 팔만 리주 지구상에 처하였으나 다 같은 등급에 있는 것이 아니오, 상중하 삼등으로 분석됨과 일국 백성 중의 귀천과 남녀 중의 귀천 분별 됨을 생각하니 이는 다른 까닭 아니라 학문의 고하를 인함인 고로 내가 이것을 깨닫고 이에 붓을 잡아 대한 부인도 고등학문을 배울 문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나의 동포 부인들에게 한마디 말로 경고하고자 하나이다.
대개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 남녀 귀천의 분별이 없이 내이셨건마는 지어 우리나라 하야는 4천여 년을 내려오도록... 남인은 귀하고 여인은 천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여자계에 학문이 없는 연고요, 오늘날 한국 부인이 다른 나라 부인들보다 천한 것도 또한 고등학문이 없는 연고라...그런즉 불가불 배울 요령을 몇 가지로 말할 터인데 첫째는 각각 자기를 위하여 고등학문을 배울 것이니 혹자 말하기를 공부하는 것은 남을 위하여서 한다고 하나 오직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노라... 내가 학문이 있으면 범사에 답답할 일이 없을 터이오, 남에게 수치 당할 일이 없을 터이니 고로 자기를 위하여 고등학문을 배울 것이오.
둘째는 풍부한 천연적 남녀동등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공부할지니 지금 세계에 머리를 들고 출세하는 20세기 부인 사회에서는 고등학문을 배워 남녀가 동등이 되었고, 오늘날 미국 여자는 투표권까지 얻게 되었는데 우리 한국 부인에게 이르러서는 투표권은 고사하고 남녀의 귀천이 옛날로 미국 종과 방불하여 남자가 앉았던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한갓 남자의 수종이 되어 인생 100년을 깊은 규문 안에서 슬픈 탄식으로 지나게 되었고, 다만 아는 것은 해가 동으로 올라오면 아침인 줄 알고, 서로 기울면 저녁인 줄 알아 완전히 듣는 귀머거리와 보는 소경과 걷는 앉은뱅이와 말하는 벙어리로 이름 좋은 삼천리 옥중에 길이 있다가 세상을 이별케 됨은 보통 학문이 없는 연고라... 만일 금일이라도 남녀동등권을 얻고자 하면 고등학문을 배우시오...
셋째는 한 집과 일꾼을 위하여 배울 것이니 한 집은 두어 사람이나 부모 형제 처자가 합하여 이룬 집이니 그중에 가정사를 근력 초조하며 유아를 교육하여 장래 대재를 예비하는 자가 뉘뇨. 이는 가정주부가 아니요. 여차한 큰 직임을 맡은 부인이 무식하면 그의 교육을 받아 후일에 꽃다운 영웅에 이름을 얻으며 중대한 사업을 이룰 자 저의 전정이 가석하지 않으리오. 대개 한 집에 희락을 누리지 못하여 하루가 멀다고 집안에 소리와 일가에 싸움이 빈번함은 다 부인에게로 좇아 나오나니 이는 학문이 없은 연고라... 그러나 부인이 고등학문이 있으면 항상 집안이 화목할 방책을 연구하여 그대로 말하고 일하며 일가의 화목할 것을 생각하고 실행함이니... 어찌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 날로 더하지 않으리오. 이와 같고 보면 그 집과 그 문중이 부인으로 말미암아 빛날지니 불가불 우리 한국 부인들도 고등학문을 배워야 할지로다.
넷째는 일국을 위하여 고등학문을 배울 것이니 이로 말하면 일국은 한 집과 일문을 합하여 성립한 것이라. 그런즉 나라의 근본은 1문이오, 1문의 근본은 한 집이오, 한 집의 근본은 부인이라. 이렇게 중대하고, 영광스러운 짐을 진 우리 1천만 부인들은 깊은 잠을 일찍 깨어 고등학문을 배워서 우리의 직분을 다합시다. 대저 어른이 어린아이보다 낫다 함은 아는 것이 나으며, 생각하는 것이 나은 까닭이며, 우리나라 남자가 부인보다 낫다 함은 아는 것이 많고 생각하는 것이 나은 까닭이니 이는 본시 그 성품이 나은 것이 아니오, 해가 가며 날이 가는 동안에 학문을 연구하여 그 지식을 확충한 연고로 나아진 것이라. 그러나 남자 중에 영웅호걸 됨이 부인으로 말미암아 되지 아니한 자 어디 있느뇨. 맹자는 중국에 성인이로되 그 모친의 삼천지교와 단기 권학을 받으므로 되었고, 알렉산더 제일 같은 영웅도 그 모친의 특별한 교육을 받은 후에 유럽과 아시아에 명성을 떨쳤으니 이를 보면 과거 영웅들도 다 부인의 교육으로 말미암음이요, 장래도 그러할 것은 천연한 이치라. 이를 보면 붓을 들고 생명 재산을 보호할 자도 부인이오. 국권을 회복하고 지킬 자도 부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금일 문명한 나라는 부인의 고등학문이 발달하므로 남자의 일을 감당하여 일호라도 남자에게 내리는 일이 없나니 우리도 비참하고 부끄러운 지위에서 떠나려 하면 우선 고등학문을 배워야 할 것이며, 자유 천지에 영영한 복락을 주리며 열국의 치쇼를 면코저 할진 데 하루바삐 고등학문을 배웁시다.
이상에 고등학문을 배워야 할 일을 말하였거니와 지금은 배울 사람을 말하건대 임의 칠팔십 세 된 노인이 아니오, 이미 세상을 작별하고 천국으로 가신 우리 할머니도 아니오, 다만 청년 부인들이 배울 사람이라. 여자가 학문을 배울 것이라 한 문제면 어떠한 여인이나 배울 것이나 이는 고등학문이라 하는 문제라. 이에 대하여는 이왕 학도 된 사람과 지금 학생으로 있는 사람이며, 장차 학생 될 사람이라. 그러면 아직 학생이 못된 부인이라도 점점 계급을 따라 고등학문까지 배울 수 있으니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세상에 모든 일이 다 여자에게 고등학문이 있으야 될지니 어찌 힘쓸 바 아니리오. 그런즉 한국 부인들은 옛날 아간 부인과 라란 부인을 효 측 코면 천시 만고를 참고 고등학문을 힘쓸 것이거니와 1천만 남자들도 남자의 직분을 다하고자 할진 데 여자의 고등학문을 찬조할지어다.”
황혜수는 1913년 7월에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 학무국 임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2월에 상항 총회관에서 개최된 북미지방 총회 총부회장 취임식에서 그녀는 오빠 황사선 등과 함께 ‘동정가’를 불렀다. 유학생 신분에서 그녀는 1914년 4월에 재해로 인하여 서간도 동포의 기황 사태를 돕기 위하여 50센트를 기부했다. 밀스 중학교에서 앨라배마주에 있는 아테네 중학교로 전학하여 1915년에 졸업한 후 이듬해 아테네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사업학을 전공하고 1919년에 졸업하였다.
아테네 대학을 졸업한 그해 6월에 황혜수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개최한 미국 감리교 100주년 기념식에 남녀와 아동 등 20명의 한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한 후 상항을 거쳐 하와이 호항으로 이주하여 그해 9월에 호항 한인 YMCA 총무가 되었다. 이듬해 YWCA 안에 어머니 클럽을 조직하여 길거리 표지판 읽기, 병원 진료받기, 자녀 옷 만들기, 영양 음식 만들기 등을 가르치며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1924년 여름에 캘리포니아대학 여름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황혜수는 문또라, 최두욱과 함께 그해 10월에 호항 한인감리교회 엡윗 청년회 고문이 되어 청년회 발전을 도모하기로 하였는데 그해 본 청년회는 회원 연령을 35세까지 연장한 가운데 회장 정봉관, 부회장 강영각, 서기 현알피시, 재무 정왈라, 학문국 홍영매, 교제국 현베드로 등이 새롭게 다짐하였다. 1927년 5월에 범태평양교육회가 개최되었을 때 황혜수는 김영기와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한 후 그해 10월에 회원 20명과 함께 호항 한인 YWCA에 한인 2세 여성을 중심으로 형제클럽을 발기하여 한국 전통문화를 가르치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웠고, 1929년에는 무궁화 구락부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3월에 YWCA에 한인 이민 3세 소녀를 중심으로 해당화클럽을 조직하여 한국 문화와 예술과 풍속 등의 강연회를 열어 기독교인으로서 모범적인 생활을 장려하고, 한국 전통문화를 가르쳐 계승하여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는 데 주력했고, 그녀를 이어 공백순과 함할라 등이 이끌어 약 20년간 계속되었다.
1935년 1월에 모인 호항 한인제일감리교회 계삭회에서 황혜수는 문또라 등와 함께 전도사로 임명받았고, 수년간 재임한 여자 청년회 간사로도 활동했다. 그해 2월에는 부인 보조회 정기회로 모여 새 직원을 선정하였을 때 황혜수는 이헬렌과 함께 사교원을 맡았다. 그날 회장은 안정송이었다. 그해 7월에 휴가를 얻어 캘리포니아로 향했다가 8월에 귀항하여 9월에 부인 보조회 주최로 있었던 환영식에서 황혜수가 미주 한인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해 11월에 송치순, 안시택과 함께 황혜수는 호항 한인제일교회 전도사로 임명받았다. 황혜수는 1937년 12월에 호항 한인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 임두화의 사회로 모인 호황 한인제일감리교회 계삭회때 본처 전도사로 보고했고, 그날 1938년도 본처 전도사로 강영각과 함께 임명받았으며, 서기를 추천하고 월보 재간행에 재청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황혜수는 1940년 1월에 무용에 조예가 깊은 채용하와 함께 2년간 한인 YWCA 안에 한국무용과를 설치하여 한국 문화를 알렸다. 이듬해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가운데 1942년 1월에 하와이 사회 전체의 단합과 사기에 관계되는 한인 집단의 문제점이나 요구사항을 군정 본부에 알리고 정부의 필요한 소식을 한인사회에 전달하여 최대한 시민들의 단합과 협동 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민간방위청 사기부 산하 10인 하와이 한인 실행위원회가 조직될 때 YWCA 총무 황혜수도 선정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건강이 좋지 않아 황혜수는 1943년에 한인 YWCA 총무직을 사퇴하고 퇴직하여 한인 YWCA는 사실상 문을 닫게 되었다. 전도사이자 한인여성교육가이고 독립운동가였던 황혜수는 1984년 10월 14일에 호놀룰루에서 9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누아누 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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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