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신광희(申光熙)는 1878년 윤3월 17일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동면 작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소년시대에 시위대 하사로 근무하면서 영문의 부기를 정리하였는데 러일전쟁이후 광무 구식 군대가 축소되고 폐지되었다. 1904년 12월부터 1905년 1월까지 활성신문에 7차례에 걸쳐 게재된 멕시코 한인 이민자 모집 광고에 속아 그는 멕시코 노동이민선에 올랐다.
1905년 5월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살리나 크루스 항에 도착한 신광희는 에네깽 농장에 도착했다. 살인적인 더위 속에 노예처럼 혹사당하면서 노동에 종사했다.
4년 계약은 1909년 5월 12일이었으나 김제선, 김윤원, 이근영, 황면주, 방경일, 조병하와 함께 신광희는 농주에게 속전 80페소내지 100페소를 지불하고 자유를 얻어 메리다로 진출했다.
와하께냐 농장 예배 인도자
메리다에서 김제선과 함께 신광희는 1908년 10월 5일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와하께냐 농장에서 한인들을 모아 주일날 예배를 인도했다. 메리다 교회가 모교회였다면, 노동현장에서 모인 교회는 지교회에 해당했다. 이외에도 끼띤깝첸 농장에서도 교회가 있었다.
채등진이 1908년 9월에 치와와로 이주하였는데 미국 상항의 공립협회로 연결되었고, 이근영의 청탁으로 1909년 4월 3일에 황사용과 방화중이 견묵위원으로 파송 받아 그달 18일에 쁘로그레소 항에 도착했다. 황사용은 국민회 지방회를 설립하고, 방화중은 교회를 설립할 목적이었다.
1909년 5월 10일에 70여 명의 농장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메리다에 국민회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가입한 회원 305명중 신광희도 있었다. 그날 신광희는 서기에 선임되었다. 그 외 임원은 회장 이근영, 부회장 방경일, 총무 및 재무 김윤원, 학무원 황면주, 법무원 조병하, 구제원 김제선 그리고 평의원에 김구현, 최정식, 이근하, 이국빈, 유진태, 김대선, 김성민, 김태진 그리고 박선일이었다. 서기 뿐만 아니라 그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신한민보 1909년 5월 26일자에 실린 신광희가 보고한 다음의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보고서에서 그의 목회자 됨을 읽을 수 있다.
“유카탄에 재류한 동포의 4년간 압제 중 경과한 일은 말하고저 하매 이가 시고 뼈가 저린지라. 이곳에 가장 권세 있는 자로 칭하는 사람의 농장은 명 왈 ‘야스채’라하는데 이 농장에서 동포 70여인이 압제를 받음도 다른 곳보다 더욱이 심한지라. 동포 중 장봉환, 정춘식, 이수근 3씨는 본래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농주의 학대를 종종 거리책지하고 무리한 일을 저항하다가 수삭 전에 기한이 임박한고로 이왕 계약대로 수로금을 매인 백원씩 출금하라고 통주에게 엄히 말한 즉 농주는 이 세 사람을 두었다가는 나중에 말썽거리가 될 줄로 알고 기한 전에 내어좆는지라. 타인 같으면 밖에 나온 것만 다행으로 알 터이로되 이들은 본래 동포를 사랑함이 특별할뿐더러 쫓겨나올 때에 같이 있던 동포를 상면도 못하였으니 필경 저들은 우리 3인이 농주에게 무리한 일을 당하여 옥에 갇혔거나 험한 곳에 유배를 당하였을 줄로 알지니 한번 가서 만나보고저하나 농주가 허락지 않는 고로 하루 밤에는 이 세 사람이 작반하여 40리 밖 되는 곳에 가서 동포들을 간신히 만나보고 눈물이 앞서서 정회를 다 펴지 못하여 날이 새고저 하매 즉시 돌아왔더니 이것은 쥐도 새로 알지 못하거늘 어떤 자가 이 일을 농주에게 고발하여 장, 정, 이 3인을 즉시 감옥에 착수한지라. 전설을 듣건 데 이들이 1년이나 혹 2년 징역에 처한다하니 대개 농장규례가 자기 있던 농장에는 마음대로 무상출입하는데 이같이 무리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이곳 법관이 모두 농장주인인고로 무리한 압제를 행함이니 이같이 억울한 일은 하늘을 부르짖어도 응함이 없고 땅에 호소하여도 대답이 없는지라. 일반 동포가 다만 억울한 한을 품고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사 하행으로 우리 국민회 북미총회에서 황사용, 방화중 두 위원을 파송하여 4년간에 거의 죽게 되고 근근이 산 천 여명 동포를 위문할 차로 수륙원정을 발섭하여 건너오던 처음에 1번으로는 4년 동안 인간 지옥에 참혹한 고초를 당하던 마음을 활기로 고동하여 국민회의 대 단체를 성립하며 일변으로는 장, 정, 리 3씨의 억울히 피수함을 경악하여 수차 거소하되 농주의 세력을 당할 수 없는 고로 묵화 백원을 주고 법률사 1인을 고빙하여 2주간을 연속 재판한 결과로 3인이 무죄 백방된지라. 방석된 3인의 감각한 마음은 이로 측량할 수 없거니와 이곳 1천명 동포의 용약하여 치하하는 수리가 가득히 높았으니 두 위원의 파송됨이 어찌 천우신조함이 아니리오. 그러나 또한 두 가지 무리한 일을 아직도 펴지 못함이 있으니 현금 일반 동포가 기한이 지내어 모두 자유를 얻었으되 어떤 농장에는 부모 없고 20세 미만한 아이들은 3년 동안을 더 역사를 시키겠다하여 영영 노예를 삼고저 하는 일이요, 또는 이곳 농장이 모두 20여 처인데 기한이 차서 나올 때에 매명 1백 원씩 수로금으로 준다는 계약대로 시행한 농장은 겨우 3처 농장밖에 없고 그 여 다른 농장은 계약도 불구하고 주지 않고저 하니 이상의 두 가지 일은 불가불 크게 송사하여 귀정하기로 방금 협의중이온데 이곳 법관과 법률사가 모두 농주의 세례 밑에 종사하는 자들인 고로 송사하기가 매우 극란하오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일심협력하여 기어이 재판을 일으킬 작정인데 우선 장봉환, 정춘식, 이수근 3씨의 일로 재판 비용을 연조한 제시는 여좌하오다... 이상 93원 35전.” 그도 1원을 기부했다.
1910년 6월에 메리다 지방회가 유카탄에 헌류하는 동포를 원동으로 이접키 위하여 공동합자회사를 조직하였을 때 감독 정춘식과 서기 김기창과 함께 재무에 신광희가 선임되었다. 유카탄에 있는 동포 전체가 매 주일에 1원씩 동맹 저축하였고, 장차 원동으로 가는 선비를 예비하였다. 같은 달에 동포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하여 본 회관 안에 교실을 마련하고 교사를 선정하였는데 방한규, 박상오, 이희성, 김영준, 김성준 그리고 박순석이 등록하였고, 교사에 신광희였다. 그는 본국 역사, 지리 등을 가르쳤다. 신광희의 와하께냐 농장 교회 목회는 프론테라로 이주하던 1910년 말까지 약 2년간이다.
국민회
1910년 12월에 메리다에서 김제선과 정춘식 등 40여명과 함께 신광희가 프론테라로 이주하면서 그는 국민회에 집중했다. 프론테라의 농주와 5년 계약을 맺고 가옥을 건축하고 토지를 개간하였으며, 자치제를 이루어 지방회 이름을 신한동이라고 하였다. 신광희는 대표로 선임되었고, 동장에 정춘식, 서기에 김기창, 재무에 박국천, 찬조원에 김윤원, 김태진, 박국천 등을 선출했다. 이듬해 12월에 신한동 지방회를 조직할 때 신광희는 김성민과 함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과테말라 고지에서 흘러내리는 그리할바 강의 홍수로 한인들이 흩어졌다.
신광희는 오학기나 지방으로 이주했다. 1912년 5월에 7,80명으로 일신학교를 설립할 때 신광희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감독에 서현우였고, 교장에 김윤원이었다. 그런데 1년도 못되어 한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1914년 북미지방 총부회장 후보에 조성학과 더불어 신광희가 대의회에서 천거하였으므로 이 때를 전후하여 미국으로 이주했다. 북가주의 윌로즈에 거주하면서 벼농사를 하였고, 북미실업주식회사에 가입하였다. 1920년에 대한인비행가 양성사가 조직되면서 총재에 김종림이, 재무에 이재수와 함께 신광희가 활동했다.
이듬해 3월에 윌로즈에서 맥스웰, 윌리암스, 치코에 거주한 남녀 동포 82명이 모여 독립선언 제2회 기념 축하식이 있었다. 광채 있는 태극 기장과 기화요초로 단장한 가운데 지방회 회장 임준기의 개회에 이어 일동이 애국가를 부른 후 강영문이 기도하였고, 사회자 임준기가 취지를 설명한 다음에 신광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유년 학생이 노래하는 가운데 일동 국기 경례식, 강영문의 임시헌법 낭독, 임헬렌과 임혜솔의 창가, 송덕용의 축사낭독, 임보배의 간도 참상가, 전명운의 연설, 김대연의 음악, 최병익의 ‘정의의 희생’ 연설, 김일리스와 최병익의 경축가, 김종림과 송덕용의 ‘국민개랍주의 실천’에 관한 통론, 유년학생의 창가 그리고 일동의 삼호만세로 마쳤다.
이즈음 신광희는 맥스웰로 이주했다. 1922년 12월에 맥스웰 지방회가 임원을 선정할 때 회장 윤응호, 부회장 양순진, 서기 송덕용, 재무 송이균, 법무 임치호, 실업부 마춘봉, 구제원 김계선, 대의원 이 암과 함께 신광희는 학무로 선출되었다. 1923년 11월에 있었던 국민회 멕스웰 지방회에서 그가 법무로 선출되었다. 1924년 1월에 보고된 윤응호, 이 암, 송이균, 양순진, 송덕용, 이진섭, 김창헌, 박응성, 마춘봉, 임선봉, 김계선, 심상옥, 류명선, 임지성, 박영순, 이재수, 임치호, 송옥균, 한성준, 맹정희, 강대근, 이성내, 양대진, 임이채, 이영서, 등 맥스웰 지방 한인 명단 26명 중 다수가 맥스웰 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메리다 교회 지교회인 와하께냐 농장 한인예배 인도
1914년 미국으로 이주, 애국운동 한글교육 등 앞장
1920년 11월에 신한민보에 국민회 중앙총회의 감사장이 게재되었다. 국민회 중앙총회에 회비를 전부 납부한 김종림, 임준기, 김승길과 함께 신광희도 포함되었다. 북가주에 거주하던 때 신광희의 기부는 폭넓었다. 때마다 국민 의무금을 냈고, 양성소 중수를 위하여 기부하였으며, 국치일 기념 적립금에 기부했고, 전시 미주한인의 금력에 찬조했으며, 독립의연에도 기부했고, 한인 비행기 학교에도 기부했으며, 내지 수재 구제를 위하여 기부했고, 내지 기근 구제를 위하여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이창서를 구제하기 위하여 기부했고, 김영수의 자비 마련을 위하여 기부하기도 했다.
1924년 1월에 신광희는 나성으로 이주했다. 그해 나성에서 동지회 교회가 개척되면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등 3교회가 있었다. 이 중 한 교회에 다녔을 것이다. 나성에서도 그의 기부는 의무금 뿐만 아니라 기근 구제금과 내지 수제금으로 계속되었다.
신광희는 1935년경에 딜라노로 이사하고 수박농사를 하였다. 김 탁 목사가 목회하던 딜라노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1936년 9월 19일 하오 8시에 김 목사 사택에서 태극클럽이 모였다. 이날 김병연, 김성권, 조울림, 윤응호와 함께 신광희가 훈사를 담당했다. 태극클럽은 1934년에 조직된 2세 모임이었다. 그의 기부는 이곳에서도 의무금, 적립금, 삼일적립금, 의연금, 본국 수재 구제금, 행령 참가 특연, 임시정부 후원금,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건축의연금으로 이어졌다.
1939년 4월 30일 하오 7시에 임치호의 주택에서 동갑네기 임치호와 함께 신광희의 회갑잔치가 있었다. 이날 임치호에 이어 신광희는 ‘나는 어찌하여야 살아있을 동안에 동포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할고 생각할 뿐이올시다’면서 감사하였다. 임치호 부인이 음식을 갖추고 오찬을 같이하는 때 금잔을 드려 남산수를 빌었다. 이 날 신광희는 만년에 일신이 소슬한 가운데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베이커스필드 양로원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신광희는 1941년 7월 30일에 향년 63세로 별세했다. 8월 1일 하오 2시에 김 탁 목사가 주례하여 발인식을 거행한 후 딜라노 공원묘지에 하관했다. 동해수부 홍 언이 ‘신광희 군의 서세를 슬퍼함’이라는 시를 읊었다: 갑옷을 벗은 몸에/ 베옷이 처량하고/ 창해에 남긴 백발/ 금실도 끊어졌다/ 고향의 상창매화를/ 못잊노라 하더니. 대한민국정부는 2015년에 그에게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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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