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장라득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은 1876년 8월 15일 또는 같은 달 25일, 또는 1878년 8월 4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결혼하였으나 홀아비로서 1903년 4월 1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닙본 마루에 몸을 의지해 하와이로 떠났다.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하기는 그달 30일이었으나 종합 신체검사를 한 후 호놀룰루를 밟기는 다음 달인 5월 2일이었다. 그런데 5일 후인 그달 7일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유학차 1902년에 도미한 도산 안창호와 그의 부인 이혜란을 장라득이 만났을 것이다. 장라득이 상항에 도착한 지 4개월이 되던 1903년 9월에 도산 안창호가 상항에서 동포 인삼 장수의 싸움을 보고 개선책으로 상항 한인친목회를 창립할 때 장라득도 함께 회원으로 가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가 회장이 되고 회원에 박성겸, 이대위, 김성무, 박여운, 장 경, 김찬일, 김병모, 전동삼, 박승지 등으로 조직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계속 상항으로 건너오면서 상항 한인친목회 회원수가 49명까지 되었다고 하니 이 명단에는 장라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 1905년 1월에 일제는 호놀룰루 주재 일본 총영사 사이토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해 재미한인을 통치하려 했다. 이에 일제의 재미한인 지배에 대응하기 위하여 1905년 4월 5일에 위의 상항 한인친목회가 중심이 되어 상항에서 항일운동과 동족지원을 목적으로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장라득이 공립협회 창립멤버 49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본다.
상항 한인감리교회
그런데 상항 한인친목회의 몇몇 기독교 신자들이 따로 예배를 보기 시작하면서 이듬해인 1904년에 방화중이 문경호와 함께 전도회를 조직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전도하였다. 장라득이 이 전도회에 소속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해 6월에 상항에 도착하여 방화중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한 차이석이 쓴 ‘금산’에서 장라득이 함께 한 당시의 예배정황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주일예배는 미국에 도착한 후 첫 주일 오후에 로비에서 열렸다. 이 예배에는 중국인들에게 한국 인삼을 파는 몇몇 상인들과 미국인 집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들 중 2명은 평양에서 나의 이웃이었는데, 김관유는 오랜 친구였고... 다른 사람은 중앙교회 방 장로의 큰아들(방화중)이었다. 하와이에서 새로 온 사람들로 인해 회중은 알맞은 규모를 이루었다. 나는 창문을 보며 김관유와 그 동무(방화중) 사이에 앉았다. 물론 예배는 방 형제(방화중)가 한국말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인도했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미국 땅에 도착한 지 처음 참석한 주일예배였고, 찬송과 기도와 설교하는 법을 가르쳐준 선교사들이 온 나라에서 우리말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오랜 지기와 동포를 만나는 기쁨이었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모두 일어서서 예배를 마치는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정면의 창문을 깨고 잘 조준된 미사일 즉 주먹만한 돌이 폭탄처럼 날라 들어왔다. 그것은 창 앞에 앉아 있던 나와 방 형제를 가까스로 비겨나갔다. 우리는 놀라서 예배를 멈추고, 소유자인 황 씨가 조사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들어와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안합니다. 이것은 여기서 처음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알기로, 대개 여기 이웃은 친절하고 조용합니다. 아마 지나가는 부랑자나 술꾼이 한 짓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905년 7월에 미국 감리교의 존슨 목사가 한인선교를 위하여 상항의 ‘페이지 스트리트 521번지’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를 설치했다. 예배를 위해서 두 개의 거실을 사용하였고, 한인이 기숙할 수 있도록 13개의 침대를 포함하여 간단한 가구가 있었다. 본 한인교회는 미국북감리교 태평양 일본인 선교지방 아리에 있었고, 문경호 전도사가 목회했다. 상항 한인감리교회는 이때를 창립일로 지정하고 있다. 1906년 6월에 내리교회 담임목사이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였던 조지 존스 목사의 추천으로 문경호 전도사를 대신하여 방화중 전도사가 본 교회를 섬겼다. 이즈음 내한 선교사 윌리엄 A. 노블 목사가 한국으로 가는 길에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그날 3명이 세례를 받았다. 노블 선교사에게는 해외에서 한인에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례를 준 뜻깊은 날이었다. 방화중은 상항뿐만 아니라 바카빌과 세크라멘토까지 목회의 영역을 넓혔다. 그해 9월 통계는 입교인이 18명, 세례 교인이 22명 그리고 학습교인이 15명이었다. 이들 중 17명은 상항에 거주했고, 23명은 바카빌에 거주했으며, 나머지 15명은 세크라멘토에 거주했다. 얼마 후 방화중이 나성으로 이주하면서 양주삼 전도사가 1906년 11월부터 본 교회를 시무했다.
1907년 11월 10일 주일 밤에 상항 한인감리교회 청년회에서 ‘국권을 회복하려면 정치에 있지 아니하고 실업에 있다’는 문제로 백윤조와 함께 장라득이 연설하였는가 하면 다음 달 22일에는 ‘상업을 발달하는 방책’에 대해서 연설하였으므로 장라득의 높은 지도력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지도력은 그해 12월에 그를 상항 지방회 경찰과 응접위원 2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함에서도 볼 수 있다. 그해 다른 임원에는 회장 최유섭, 부회장 김영일, 대의원 총무 겸 사법에 양주삼, 서기 송종익, 구제 조성환이었으며, 또 다른 응접위원은 김길연이었다.
이듬해인 1907년 6월에는 상항 한인감리교회 청년회에서 황사용과 함께 장라득을 앞세워 ‘지육보다 체육이 급하다’는 문제로 가부 토론을 하였다. 그해 8월에는 ‘문학보다 실업이 승하다“라는 문제로 전성덕과 함께 장라득이 가부로 토론한 후 적당한 연설로 그 문제를 해석한 자들이 이승만과 신흥우이었으므로 장라득의 지도력을 쉽게 가름할 수 있다. 그해 10월에는 장라득이 최덕룡과 오대영과 함께 ‘일본에 대한 정략’이라는 문제로 토론하였고, 다음 달에는 장라득이 박윤조와 함께 ‘국권을 회복하려면 정치가 아니라 실업에 있다’는 주제로 토론하였으며, 그해 마지막인 12월에는 장라득이 ‘상업을 발달할 방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1907년 12월에 있었던 청년회 임원선거에서 장라득이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음은 자연스럽다. 선임된 다른 임원은 회장 허승원, 서기 송종익, 회계 김영일, 정원도, 경찰 박윤하, 응접부 전득부, 통신부 김영일 그리고 사법 이대위였다. 이듬해 12월 6일에 선정한 상항교회 청년회 임원진에 장라득이 교제부장이었다. 그해 다른 임원은 회장 김성권, 전도 이대위, 인제 박윤하, 학문 정재관, 통신 정원조, 회계 허승원이었다.
1909년 상항 한인감리교회가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귀국한 교인도 포함하여 작성한 연합교우록에 기록된 교인은 48명인데 첫째 이름이 양주삼이고 장라득은 두 번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라득이 본 교회 세례명단에 없으므로 도미하기 전에 그의 고향 강화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상항에 거주하던 마영준이 장기간 와병으로 고생하는 소문을 듣고 각처 동포가 구제금을 보냈는데 1909년 9월 15일자 신한민보에 기부한 명단과 그 기부금 액수에 따르면 장라득은 거금 10달러를 기부하였다. 그해 11월에 이흥주와 민병기가 한국을 떠나 유럽을 돌아서 미국으로 오던 중 런던에서 곤란을 당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재미한인들이 기부금을 보냈고, 이들 두 명이 기부금을 보낸 명단과 기부금 액수를 신한민보에 게재하였는데 장라득이 한번도 보지 못한 동포에게 1달러를 기부하였다. 이러한 기부자였던 장라득이 그해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가 내년 구제원에 장라득을 선정할만했다. 그의 구제 행렬은 이듬해 애국동맹단 의연금에 이어 1911년에 청국 구제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12년에는 본 지방회의 회장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상항한인감리교회 엡위스청년회 전도국장으로 활동
교회 헌금과 독립지원, 미주한인 구제에 항상 앞장
전도국장
상항 한인감리교회가 발행한 1911년 8월자의 ‘대도’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나간 6월 4일에 본 회당에서 엡위스청년회원이 통상회를 개회고 각 임원을 교체함이 여자하더라. 회장 강영소, 전도 장라득, 학문 최정익, 인제 박영식, 교제 양주은, 통신 강 번, 회계 박윤하.” 위의 보도에서 장라득이 전도부장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통상적으로 전도부장은 인근 도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전도하였는데 장라득도 전도인으로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전도 활동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교회 목사는 그해 2월에 부임한 이대위 전도사였다.
1912년 1월에 발간된 대도가 상항 한인감리교회의 경비부족으로 작년에 특별히 헌금한 명단과 그 헌금액을 발표하였는데 그 명단에서 장라득이 거금 4달러를 헌금했음을 알게 된다. 그의 기부에서 주님의 말씀인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마태복음 6:21을 쉽게 상기하게 된다. 1919년에 장라득이 선뜻 기부할 수 있었던 전시 미주한인의 금력 찬조와 의무금과 독립의연 그리고 기미독립만세운동 구제금 등은 결코 뜻밖이 아니다. 이러한 기부는 그의 믿음에서 가능했다.
1920년 11월 25일 오후 8시에 옥스 스트릿에 있던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추수감사절 예배가 있었다. 일동이 235장을 합창한 후 최진하가 기도하고 취지를 설명한 다음, 상항 국어학교 학생들이 합창하였고, 사회자의 성경 봉독에 이어 최피터와 황반도가 감사절의 문답을 한 후 하소정의 독창에 이어 최데다와 황엘리자벳과 하소정이 삼중창을 하였으며, 정인과 목사가 설교하였고, 전봉운의 음악 순서에 이어 이대위 목사가 축도하고 폐회를 하였다. 이후 지난 한 해 감사하는 간증 시간에 형제자매가 경쟁적으로 나와 받은 은혜를 감사하였는데 그중에 상항 한인감리교회 초창기부터 열심과 성력을 다한 장라득의 감사는 가장 큰 은혜를 끼쳤다. 그가 한 감사의 내용을 찾지 못해 아쉽다.
감사를 아는 장라득의 구제는 1921년의 간도 참상 구제금과 특별 외교비 의연금에 이어 1925년의 인구세와 서재필 박사 여비로 연결되고, 1928년의 만주 거주 동포 동정금, 한국 수재 구제금 그리고 국민회 보조금에 이어 1929년의 전명운 의사 부인 장비와 1930년의 장인환 의사 장비, 1937년의 항일전쟁 동정금, 임시정부 후원금,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그리고 1940년 신한민보 식자기계 의연과 광복 후원금으로까지 신한민보에 보도된 대로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1942년에 제출한 세계 제2차 대전 징집서류에 따르면 장라득은 임CH가 운영하는 상항 스탁톤 1116번지의 한인 여관에서 식당 노동자로 활동했다. 그 후 정든 상항을 떠나 나성으로 이동한 그는 1954년 1월 15일에 연방정부 사회보장제도에 가입하였는데 이듬해인 1955년 11월 6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성에서 향년 7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성 앤젤러스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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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1.2021